‘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우순풍조 시화년풍(雨順風調 時和年豊)’ 그리고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에 이르기까지 예부터 입춘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이 같은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였다. 지금은 비록 줄어들긴 했어도 아직 도시,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입춘축은 가정의 건강과 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나라에서도 입춘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입춘이 새해에 드는 첫 절후라 해서 궁중에서 의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고려사(高麗史) 입춘하례의(立春賀禮儀)’에 의하면 ‘인일(人日)의 축하 예식과 동일하나 다만 입춘에는 춘번자(春幡子)를 받는다’고 했고 ‘입춘날에 백관이 대전에 가서 입춘절을 축하하면 임금이 그들에게 춘번자를 주고, 이날 하루 관리에게는 휴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입춘하례(立春賀禮)가 있었던 셈이다.
임금이 하사한 춘번자는 비단을 잘라 만든 작은 표기를 말한다. 그런가 하면 문신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중에 좋은 것을 뽑아 연잎과 연꽃무늬를 그린 종이에 써서 궁궐 여기저기 붙였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 따르면 이를 춘첩자(春帖子)라 했으며 적는 글은 입춘이 되기 열흘 전에 승정원에서 시험을 통해 발췌한 글을 선택했다고 한다. 중요시 여긴 절기에 쓰이는 문구인 만큼 절차도 까다롭게 진행한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엔 이런 내용도 있다. ‘입춘날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주사(朱砂)로 벽사문을 써서 대궐에 올리면 대궐 안에서는 그것을 문설주에 붙였는데 이를 입춘부(立春符)라 했다.’ 악귀를 쫓는다는 입춘부의 글 내용은 대략 이렇다. ‘갑작은 흉한 것을 잡아먹고 필위는 호랑이를 잡아먹고 웅백은 귀신을 잡아먹고 등간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잡아먹고 남제는 재앙을 잡아먹고 백기는 꿈을 잡아먹고 …중략… 네가 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열두 신들의 밥이 되리라. 빨리 빨리 법대로 하렸다.’
입춘을 맞아 겨울의 묵은 때를 벗고 좀 더 나은 변화를 추구하려는 마음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아직도 한겨울을 헤매고 있는 정치권을 비롯 청와대와 정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입춘을 기점으로 그들도 조금이나마 변했으면 좋겠다. 건물마다 ‘입춘부’를 붙이기 전에.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