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무예는 상대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상대의 움직임을 적절하게 통제하거나 무너뜨릴 수 있도록 수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체계화시킨 것이다. 보다 빠르게 상대에게 충격을 주기 위하여 근접전형 방식의 주먹을 사용하는 것으로 체계화시키거나 혹은 단 한번의 충격으로도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발기술을 보강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상대의 타격식 주먹이나 다리를 똑같은 타격방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근원이 되는 몸을 밀착하여 제압하는 유술방식으로 발전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파해법으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기본 목적이다.
칼이나 창을 비롯한 무기를 활용한 무예 역시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칼로 베거나 창으로 찌르는 등의 방법이 만들어졌다. 또한 상대보다 짧은 무기를 사용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상대의 긴무기를 무력화시킬지를 쉼 없이 고민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무예 수련에서 직접 상대와 몸과 몸을 맞대거나 무기를 맞대는 겨루기나 교전은 가장 빠르게 상대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그 무예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런 이유로 무예의 기본기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는 것이 바로 안법(眼法) 즉, 상대를 바라보는 눈의 활용법이다. 상대의 기술이 아무리 현란하고 빠르다고 해도 내 눈에 제대로 그 움직임이 보인다면 그저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이다. 또한 단순히 상대가 만드는 큰 움직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몸의 변화 혹은 기운의 변화를 읽어 내는 것이 곧 마음의 눈이라는 ‘심안(心眼)’이다. 상대가 불과같이 공격하면 그에 대한 대응으로 똑같이 불로 맞설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불을 만드는 핵심이 되는 흐름에 물을 부어 버리듯 꺼 버리는 움직임 등을 눈과 마음을 통해 읽는 것이다.
그런데 초보 수련자들이 가장 쉽게 범하는 실수가 바로 상대의 움직임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자신만의 움직임을 만든다는 것이다. 상대가 빠르면, 그 빠름에 맞서 나의 흐름을 변화시켜야만 상대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초보자들의 경우는 상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배운 방식대로 풀어 나가려 하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나의 변화는 곧 상대의 변화로 이어진다. 쉼 없이 주고 받는 공격과 방어의 과정이 곧 상대의 변화를 읽고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다. 소위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은 공방의 흐름 자체를 자신의 움직임으로 풀어내고 이끌어 가는 사람을 말한다. 오랜 수련을 통해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에 가능한 움직임인 것이다. 바로 상대를 인정하고 그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부, 지위, 명예를 비롯한 세상살이가 다 상대적인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만약 그 상대성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면 자신만의 독선과 아집에 똘똘뭉친 사람으로 변화한다.
동양의 고전이라 불리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면 상대성에 대해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斯不善已(사불선이),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
아름답고 착한 것 역시 아름답지 못하고 착하지 못한 것이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 만약 그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워지려 해도 혹은 아무리 착해지려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예에서도 상대를 인정하고 그 움직임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자유로운 몸짓이 가능해진다. 상대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저 혼자 움직이는 의미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세상살이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채우려 해도 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채울 수 는 없다. 오로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