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르네상스시대엔 이발사가 외과 의사를 겸했다. 당시 내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대를 받던 외과는 신체 해부나 수술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기술자 취급을 했다. 따라서 외과 의사들이 부족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발사였다. 이발사들은 칼을 다룰 수 있는 면허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직종이 이발 외과 의사(barber-surgeon)였다.
이런 이발사의 역사는 지금도 현존한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던 이발소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하얀색의 삼색원통이 그것이다. 삼색원통은 중세 유럽시대 외과 병원의 상징이었다. 색깔의 의미는, 청색은 정맥, 홍색은 동맥, 백색은 신경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발소 간판의 시초는 1540년 파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국에선 1800년대 이발소가 일종의 정기적인 음악 연주장 역할도 했다. 손님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직접 단순한 악기를 들고 노래하거나 연주를 했으며 이발사도 일하는 짬짬이 같이 연주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라이브 뮤직 이발소’인 셈이다. 미국에선 영국스타일의 이발소가 20세기까지 계속되었고, 재즈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발소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고 서구식 이발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단발령이 발표되던 날 안종호라는 사람이 왕실 최초의 이발사가 되어 고종과 대신들의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도 있다.
초창기 이발소하면 3대 기구가 빗과 가위 그리고 ‘바리캉’이다. 지금도 커트를 할때 사용하는 전동식 기계로 진화중인 바리캉은 한국에 처음 들어온 프랑스 이발 기계회사 이름이 통칭화 된 것이다. 중노년들은 그 기계로 민 까까머리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최근 한 외신이 미국의 한 이발사가 버릇없는 아들에게 수치심을 줘 버릇을 고치려는 학부모 의뢰를 받고 깎아준 노인머리(정수리머리가 휑한 까까머리) 스타일이 유투브에 올라 세계적 화제가 됐다고 보도했다.
화제가 된 이유는 자녀를 훈육할 방법을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부모들이 ‘만약 어른을 흉내 내려면 먼저 이렇게 해라’라고 사진을 내밀어 많은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발사의 역할, 예나 지금이나 다양하다. 우리나라 이발소에도 벌써 ‘노인머리전문’이라는 안내문이 붙은 건 아닐까.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