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시점이다. 모처럼 부모·형제, 친지들을 만나 덕담을 주고받으며 회포를 풀기도 하고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며 다시 만날 기약을 하는 모습에서 훈훈한 정을 느낀다.
노모는 자식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그동안 장만해놓은 것들을 주섬주섬 차에 실어주고 떠나는 차의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다. 며칠간의 북새통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벌써 그리움이 차지한다. 그게 사는 맛일까.
나도 한 열흘 동안 정신없이 살았다. 섣달 하순이 생일인 남편을 위해 생일상을 준비하여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초대해서 밤이 늦도록 놀았다. 1년 중 우리 집에서는 가장 큰 행사이기도 하다.
곧이어 가족, 친지를 위해 선물 준비하고 차례상 차리고 어른들 찾아뵙고 세배 올리는 등 정신없이 지냈다. 친정이 가까운 관계로 나흘째 친정 나들이다. 형제가 많다 보니 동기간이 올 때마다 호출이다. 슬쩍 꽁무니 빼고 싶어도 모처럼 친정에 온 형제들 생각해서 달려가다 보니 도대체 내 자유시간이 없다. 차라리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구시렁거리고 있던 참에 홈 쇼핑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방송 사상 최저가라며 이런저런 의류를 판매한다. 옷의 품질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한눈에 딱 봐도 착한 가격이다. 불티나게 팔린다.
조금 재고 망설이다 보면 벌써 치수 매진이고 카드 준비하는 동안 원하는 색상 품절, 잠깐 사이 다른 상품으로 넘어간다. 마음이 급해진다. 상품이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전화 버튼을 누르지만, 통화연결이 어렵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반코트 두 벌을 샀다. 평소에 홈쇼핑 프로를 잘 보지 않는 나로서는 대단한 결정이다. 돈을 쓰면 스트레스를 받는데 오늘만큼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 설거지 마치고 차 한 잔 하려는데 가까운 백화점에서 대폭 할인 행사를 한다는 문자가 들어왔다. 딸아이를 앞세워 가보니 할인행사 하는 매장은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이번에는 딸아이가 적극적이었다. 이 옷 저 옷 들이대며 입어보라 한다. 아침에 두 벌이나 샀으니 사양했지만 세뱃돈 받은 것으로 선물해주겠다며 재킷에 등산바지에 또 몇 가지를 샀다.
몇 시간 쇼핑했다. 행사장을 골라 다니며 싸게 파는 제품을 고르는 내가 마치 사냥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양손에 들린 쇼핑백이 싫지 않았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리자며 떡볶이도 먹고 차도 마시고 실컷 수다도 떨었다. 가끔은 자신에게도 칭찬을 해주고 수고했다고 보상도 해주어야 정신건강에 좋다며 연실 너스레를 떨어대는 딸이 있어 참 좋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이런저런 뉴스를 보게 된다. 명절 증후군에 대한 이야기다. 명절 쇠고 와서 이혼하는 부부도 생기고 시댁과의 갈등, 본가와 처가를 비교하는 등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나 혼기가 찬 미혼들, 취업하지 못한 청년들 등 아직은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더불어 사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몇 벌의 옷을 장만하고 수다를 떨다 보니 뻣뻣하던 어깨가 왠지 가벼워지고 묶였던 마음의 끈이 툭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래저래 수고했다고 나를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