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는 신체학문이다. 인간의 몸을 사용해서 그것 안에 담긴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는 것이 무예학이다. 단순히 상대와 몸을 맞대고 승패를 겨루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몸을 사용하는 기본 원리를 시작으로 하여 몸을 기르는 방식 즉, 양생(養生)의 단계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그래서 무예학 공부는 단순히 기술적인 체육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체구조 파악이나 생리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의학부터 인간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사유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철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공부해야만 무예의 본질에 접근할 수가 있다.
근래에 인터넷을 비롯한 가상공간에서 종종 무예와 관련한 다양한 논쟁들이 펼쳐지곤 한다. 어떤 무예가 실전성이 있느니, 없느니 혹은 서로 다른 무예를 수련한 사람이 겨루기를 하면 누가 이기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쉼 없이 논쟁으로 떠오른다. 그 논쟁에서 승자는 말 그대로 ‘키보드 워리어’라고 불리는 인터넷 강자들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무예수련을 하지는 않지만, 이론적으로 해당분야에 대해 깊숙이 파고들어 연구하여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경우도 많다. 그런데 대부분 누군가의 수련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이론화 시키거나, 누군가가 쓴 무예관련 이론서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맹목적으로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한 이야기나 이론을 자신의 모든 것 인양 풀어 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무예는 분명히 신체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그 현장성인 몸을 맞대고 투기를 겨루는 것이 근본이다. 만약 무예를 연구하는 것이 오로지 이론으로만 치중된다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결과물이 도출될 수도 있다. 세상 어떤 학문도 현장성을 멀리한다면 말 그대로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수련 속에서 자신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스승이나 선배 수련생들에게 듣는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된다면 이것은 무예가 아니라 일종의 유사종교의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을 보면 학문을 연구하는 기본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이라 하여, 학문을 닦아도 깊이 사색하지 아니하면 혼매하여 밝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어떠한 가르침이나 배움이든 주체적으로 깊이 있게 사고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망(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망’은 굴레나 속박 즉,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자기 스스로 공부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배움이 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학문적 발전을 저해하고 퇴보시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논어를 해석한 주희의 글을 보면 ‘망(罔)’이라는 문자를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어서 얻는 게 없다(不求諸心, 故昏而無得-불구제심, 고헌이무득)’이라고 푼 것이다.
또한 깊이 있는 사유를 한다 하더라도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롭다고 하였다. 공부를 배우는 과정 중 남의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만의 독선으로 빠지는 것은 마치 벼랑 끝에 서서 천길 낭떠러지를 내려다 보 듯 위태로운 것이다.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학문적 고립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 갖춰야할 것 두 가지는 앞선 연구의 성과들을 잘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론과 길을 개척하는 것이 학문하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무예를 공부하고 수련할 때에도 이러한 두 가지 철칙을 반드시 지켜야 올바른 신체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다. 스승이나 선배가 걸었던 길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그것에 맹목적으로 집착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과정을 통해 현장에서 새로운 세상을 펼쳐야만 보다 발전적인 공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도 그렇지만, 그렇게 두 가지를 조화롭게 병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늘 ‘망(속박)’하고 ‘태(위태로움)’ 사이를 시소의 균형을 맞추 듯 조심스럽게 운신하는 것이 공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