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막을 내린 고암 이응노 화백의 드로잉전에서 받았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선 하나하나가 이토록 생동감이 있는지, 거장의 손과 팔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가보다고 몇 번을 되뇌었다. 붓이나 잉크도 아닌 연필로 그린 선인데도 가늘게 시작하다가 힘있게 굵어지더니 다시 꼬랑지가 사뿐히 가늘어지는 기교가 살아있는가 하면, 꼬불꼬불 무심코 그린 듯한 선들에게서는 탁월함과 일종의 정확성이 느껴지고, 잔가지들을 켜켜 덧대어 그린 나무들의 풍경은 마치 화폭 안에 바람이라도 불고 있는 양 곧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드로잉 작품들은 지금까지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던 데다가 작품 수도 400여점이나 되었기 때문에 더욱 감회가 남달랐다. 주로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에 그려진 것들로 작가의 일대기에서는 일본에서 수학한 서양미술을 동양미술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를 고심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후기 작품에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화폭 전체에 감돌고 있는 운동감과 생동감은 이 시기 작품들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사실 이응노 화백은 붓으로 그린 군상화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다.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무한한 생명력을 발휘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마치 바람에 나부끼거나 파도에 휩쓸리듯 무리를 이루며 포효하는 현장을 그렸다. 추상화일지라도 ‘현장’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이 작가는 우리내 역사의 현장을 모티브로 군상화들을 구상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현장을 픽션이 주는 감동처럼 생생하게 재현한 이 작품들은 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응노의 작품 일생에서 드로잉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은 주요 작품들이 결국 (그 자체로 일종의 드로잉인) 수묵화에 천착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작품 전반에서 일고 있는 생생한 현장감이 바로 드로잉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드로잉전이 많이 열리고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드로잉을 독립적인 장르로 보기 보다는 습작이나 과정 중의 작품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응노전을 기획한 가나문화재단의 김형국 이사장은 도록 서문에서 그토록 많은 수의 그의 드로잉 작품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 상업성이 받쳐 주지 않은 탓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 서구에서는 드로잉을 단지 밑그림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인식했었고, 따라서 선은 항상 유화물감 안에 감추어져 있었을 뿐 캔버스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현대에 와서 바뀌기 시작하였는데, 드로잉이 작가의 숨은 의도를 드러내는 좋은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작가의 신체와 영혼을 비추는 내밀한 작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드로잉이 전면에 나오는 작품도 흔할 뿐 아니라 그 기법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기발해져서, 가령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작가 잭슨 폴록의 경우 물감을 붓에 찍어서 흩뿌림으로써 액션 페인팅을 보여주었고, 윌렘 드 쿠닝은 모델의 신체에 물감을 바르고 벽에 찍어 바르는 신체 드로잉을 선보였다. 세계적인 미술의 흐름이 이런데다 국제사회가 우리 내부사정에 관심을 갖고 있던 시기, 마침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것도 사연 깊은 한 한국 작가가 선보이는 수묵화 작품이 외국에서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충분히 알만하다.
그러나 이응노 작품이 관객에게 주는 감동이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다. 드로잉이 작가의 생각과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이응노의 드로잉이 비추고 있는 것은 과연 무얼까? 1930~1940년대의 한 장면이 영화의 스틸컷이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곧 다음 장면으로 이어질 것 같다고 느껴지니, 그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먼 미래와도 공명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무엇을 나타내고 있으리라. 이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기운생동하는 선들이니 한없이 날고 싶은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또한 이야기하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