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본다. 유리창 밖에서 손짓하는 봄은 끝내 발걸음 끌어내고야 만다. 우선 집 주위에도 민들레 싹이 아이 손바닥만 하고 말라죽은 풀을 쓰고 새순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세상으로 나오는 두려움을 떨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미리 정해진 암호를 주고받으며 결의의 다지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말라죽은 잎을 매달고 겨울을 난 나무들도 수마리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고 목련나무에는 바람 샐 틈도 없이 털옷으로 온 몸을 꽁꽁 싸맨 망울이 봄볕에 반짝인다. 이제 저 털옷을 벗어던지고 뽀얀 꽃잎이 얼굴을 내밀 날도 멀지 않았다.
봄이 자리를 잡는 길을 조금 걸었는데 벌써 발이 무거운 느낌이다.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프게 마련인데 아마 겨울 신을 신은 탓이리라. 눈길에도 미끄럽지 않고 추운 날에도 잘 신고 다닌 신이 둔해진 것이다. 하긴 이런 봄날에 겨울신이 당키나 할까. 주위를 둘러보니 털 부츠를 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밝은 옷과 신을 신고 있었다. 그야말로 철모르는 내 발만 아직 한겨울이었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건만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얼른 돌아오려는데 구두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평소 아는 주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조그만 가게 안에는 온갖 예쁜 구두가 진열되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해주는 대로 신어보는데 예쁘지만 발이 불편하거나 발이 편하면 너무 둔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구두는 장식이 너무 요란한 것 같아서 자신이 없고 앉아서 신어보고 걸어보고 거울 앞에서 비춰보고, 가게 안은 신었다 벗어 놓은 구두로 가득해진다. 결국 덜 요란하고 그중 편안하게 보이는 구두를 신고 날아갈 것처럼 가볍게 집으로 돌아와 나갈 때 신었던 겨울 부츠가 무슨 죄라도 지었는지 신발장에 가두고 문을 쾅쾅 닫는 모양을 바라보고는 남편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는다.
오후 내내 새 구두를 떠올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 일을 끝내고 늦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눈치 없는 남편이 사단을 내고 말았다. 구두 얘기에 서서히 안색이 변하신 어머니께서 당신도 신이 편치 않으시다는 말씀을 비치시고 결국은 다음날 모시고 가서 마음에 드시는 구두를 새로 사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무슨 물건을 사시든 그 자리에서는 마음에 쏙 든다고 하시지만 일단 집에만 오시면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타박을 하시는 습관이 있으시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구두 가게를 몇 차례나 드나들다 지치셨는지 그냥 아무거나 신는다고 하시고는 또 마음에 안 드신다고 내놓으셨다. 그럴 때마다 혀를 차던 남편이 그 물건 갔다 버리라고 하는 말까지 나오면 수그러드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상과 달리 혼자 가게를 찾아 가셨고 주인이 난감해 하며 전화를 했다. 하는 수 없이 주인에게 사과의 말과 함께 더 이상 교환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어머니께서 고르신 구두를 새로 사고 반품하신 구두를 내 구두로 바꾸었다.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와 새로 산 구두를 몰래 감추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을 하자니 속으로 자꾸 웃음이 난다. 어린 애 같은 어머니께 감사해야 하나? 그나저나 두 켤레나 되는 새 구두 신고 어디를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