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은 날카롭다. 오랜 시간을 통해 안착된 몸의 기억은 내 몸의 흉터처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또한 나의 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단순히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전세대인 부모로부터 혹은 그 이전의 기억들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뭔가를 기억하는 일은 크게 머리로 기억하는 진술기억(decalative memory)과 몸으로 기억하는 비진술기억(non-decalative memory)으로 나뉜다. 진술기억은 우리의 뇌 중 측두엽의 해마에 의해서 언어나 도형 등을 전사시켜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사진을 찍듯 그 형태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비슷한 사진에 혼동하듯 기억의 변형이 나타나기도 하며, 아예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수 없이 반복되듯 일어나는 일들이 대부분 진술기억의 형태로 저장된다. 예를 들면 하루 세끼를 쉼 없이 먹는 우리에게 그날의 밥과 반찬의 종류나 맛 역시 기억은 되지만 유사한 기억의 반복으로 인해 고작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무엇을 먹었는지 혹은 그 맛이 어떠했는지가 쉽게 기억나지 않는다.
반면 비진술기억은 몸으로 기억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움직임의 순서를 몸이 스스로 기억하는 것을 말해 절차기억이라고도 불린다. 몸을 통해 기억하는 비진술기억은 어릴 적 배운 자전거 타는 방법이나 수영하는 방법 등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도 몸에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내 몸에 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몸의 기억’ 그 자체다. 굳이 내가 내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겠다고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 몸이 그 상황에 반응하고 적응하는 것이다. 내 몸이 본능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무예의 수련도 일종의 비진술기억의 일종으로 내 몸에 각인화시키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 수많은 무예를 단시간동안 머릿속에 기억해 그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다 할지라도 정작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머릿속 기억들은 ‘얼음 땡’ 놀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다. 머리를 통해 쉼 없이 생각하고, 무수한 반복을 통해 내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예수련의 요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 버린다면 말 그대로 본능적 움직임에 충실한 싸움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단순한 움직임에 의미를 담아 스스로 풀어가고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무예를 공부하고 수련하는 일인 것이다.
〈대학(大學)〉에 보면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진실로 날로 새롭게 하면 苟日新(구일신),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진다, 日日新(일일신) 又日新(우일신)] 날마다 똑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 있는 일로 전환시켜야만 비로소 새로운 뭔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마음마저도 날마다 새롭지 못한다면 늘 제자리걸음인 것이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들도 저마다 이름이 있고, 향기가 있다. 오로지 가까이 다가가 그 향기를 느껴보고 내 눈에 온전히 담아야 내 마음 속에 남는 ‘꽃’이 되는 것이다. 발걸음 닿는 데로 무작정 걷는다고 해서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힘들어도 그 걸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제 길을 찾아 갈 때만이 온전한 제 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내 몸으로 익힌 수련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수련이 배신하지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배신이 아닌 다른 길로 내 몸을 인도할지도 모른다. 잘못된 수련은 오히려 병을 키운다. 내 몸에 새겨진 잘못된 기억들로 인해 내 몸이 더욱 고통스러운 길로 들어 설수도 있다. 늘 아는 길도 묻고,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걸어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