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58년생이 58세다. 만 나이로는 아직 1년이 남았지만 우리가 부르는 나이로는 58세가 맞다. 우연이지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어온 ‘58년생’이 58세가 된 것이다. 군복무를 마치고 82년 복학했다. 후배 여학생들이 나를 ‘58년 개띠 오빠’라고 불렀다. 그 때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무심코 넘겼다. 당시 23~24세의 58년 개띠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할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외환위기 직후 40세를 넘으면서 세상의 화두로 떠올랐다. 지금도 아무의 입에서나 주저 없이 나오는 “58년 개띠”는 90만명이나 태어났다고 한다. 지난 해 58년생의 손주뻘인 신생아는 절반인 43만5000명 남짓이다.
‘58년 개띠’는 55~63년까지 6·25 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호적정리도 부실했던 터라 57년, 59년생까지도 어울려 공부하게 됐다. 결국 100만 명 이상이 같이 경쟁하며 여태까지 살아온 것이다. 58년 개띠가 흔한 이유 중 하나다.
한 학급에 70명은 훨씬 넘었다. 이도 모자라 3학년 때까지는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2부제 수업을 했다. 휴전한 지 5년 만에 태어나 보리고개도 겪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니 미국에서 원조받은 옥수수로 강냉이 죽을 쑤어줬다. 2학년 때는 빵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점심시간(중간놀이)에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올해는 일 하는 해, 모두 나섰다~새 살림 일깨우는 태양이 떴다…’ 노래에 맞춰 삽질하는 시늉을 하며 무용도 했다. ‘뺑뺑이’를 돌려 중학교에 입학했다. 월남전 패전이 짙어지자 10전투비행장으로 귀국하는 선발대들을 환영하기 위해 장안문~팔달문까지 종이 태극기를 들고 나갔다. 고교 시절엔 공부보다는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 받기에 바빴고, 교련 검열로 시달린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들이었다. 대학에 입학했다가 군에 가니 10·26, 12·12, 5·18이라는 격동기를 맞아 반란군으로, 또는 진압군으로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다.
제대 후 대학에 복학했지만 수업보다는 데모가 더 많았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자 ‘6월 항쟁’을 이끈 넥타이부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경제성장의 중심에는 늘 58년생들이 있었다고 자부하는 세대다. 직장을 어렵게 잡아 10년 넘게 고생하며 겨우 사는가 싶더니만 불혹을 갓 넘은 나이에 외환위기로 인해 가장 먼저 길 거리로 쫓겨나왔다. 이 처럼 국가나 사회, 회사로부터 버림받다시피했지만 특유의 꿋꿋함을 잃지 않았다. 지금은 직장에서 대부분 일손을 놓아 어려운 상태지만 아직도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다. 그러면서도 자식에게 기댈 생각을 하지 않는 첫 번째 세대다. 자녀들을 시집 장가 보내려니 밤낮으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일제시대와 6·25를 겪은 우리 아버지 세대가 했던 고생에는 비할 수가 없겠지만 베이비부머 세대의 아이콘인 58년 개 띠들도 그렇다. 머리가 희끗해진 중늙은이가 됐다. 누구나 그랬듯이 처 자식 먹여살리려 앞만 보고 뛰어왔는데 직장에서 등 떠밀리고 사회와 가정에서 버림받은 세대라고 한탄한다. 60세 정년 연장을 발표했지만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렸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60세 정년을 발표한 날 그 회사는 58년생은커녕 60년생까지도 명퇴서류를 받느라 혈안이 됐다. 60대가 되면 직업의 평등을 가져온다고 했던가? 아직도 개(?)처럼 한창 일할 나이다. 젊은이들 일할 곳도 없는데 무슨 직장 타령이냐고 핀잔듣기 일쑤다.
그러나 아직 꿈과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 인생은 60부터라 하지 않는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위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 40세에 88서울올림픽이 열렸다. 회갑을 맞는 60세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린다. 학창시절 야구장에서, 운동장에서, 체육관에서 어깨동무하며 ‘아리랑’을 불렀듯이 그날엔 ‘정선아리랑’을 힘차게 불러보자.
58개띠를 비롯한 베이비부머들, 기죽지 말고 인생 이모작을 위해 뛰어야 한다. 이웃과 우리를 사랑하면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