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4계절의 시작이고 희망, 새로움, 젊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4월도 마찬가지다. 무르익어가는 봄의 길목이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4월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잔인한 달’을 떠올린다. 100여 년 전 시인 엘리어트가 ‘황무지’란 시에서 표현한 말이며 당시 황무지처럼 황폐화한 인간의 마음과 정신적 공황상태를 간접적으로 묘사한 것일 뿐인데도 4월만 되면 현재의 시대상을 빗댄 명언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를 비롯 매해 4월만 되면 잔인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
사실, 엘리어트가 잔인한 4월을 표현했던 것은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단순히 계절적인 의미를 넘어 1차 세계대전 후 황무지와 같이 삭막해진 서구인들의 정신상태를 상징했다. 사람들이 수없이 죽고 도시가 파괴된 전쟁의 비참함 속에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무한한 이기심과 탐욕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간접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4월의 정국, 왠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난해 4월은 더욱 잔인했다. 나라를 침몰시킨 거나 다름없을 정도의 고통을 동반했다. 사회 구석구석엔 잔인함이 할퀴고 간 상처가 여기저기 속살을 드러냈다. 더 흘릴 눈물조차 없을 정도로 슬퍼했다. 1년이 지났으나 희생자 가족들의 고통은 그때나 지금이나 멈출 줄을 모른다. 많은 국민들 또한 세월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잔인함도 이런 잔인함이 없을 정도면 전쟁을 치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잔인한 4월을 뼈저리게 실감케 한 세월호 참사가 내일이면 1주기다.
그 잔인함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올 4월도 잔인함은 비껴가지 않나보다. 정치권을 들여다보면 더욱 실감난다. 여권을 쑥대밭으로 만든 ‘성완종 리스트’만 보더라도 그렇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초상집 분위기가 될 정도로 잔인함을 보이고 있다. 특히 리스트에 올라있는 정치인들은 얼마나 좌불안석이겠는가. 당사자들은 물론 여당 관계자들, 나아가 여·야정치권 모두에게까지 4월이 잔인한 달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에 충분할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 회장은 4월의 잔인함을 이들보다 먼저 진저리치게 느꼈을 게 분명하다. 정치권 인맥을 동원해 두 차례 특별사면을 받았던 성 회장이 이번에도 필사적으로 구명운동을 펼쳤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돌아온 것은 실세정치인들의 철저한 외면과 필요할 때 이용하고, 단물 다 빨아먹은 다음에 필요 없으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정글의 법칙보다 더 추악한 정치권의 현실뿐이었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성 회장이 남긴 리스트가 어디로 튈지 가늠하기 힘들다. 특히 수사가 불법 대선자금으로까지 확대된다면 전·현 정권의 최고지도자도 자유롭지 못해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그의 메모는 국민 정서상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를 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상심하고 있을까. 실망하고 분노하며 4월이 잔인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특히 성 회장과 정치권의 커넥션이 돈과 탐욕이 부른 이 시대의 막장 드라마며 비극이라는 사실이어서 국민들이 체감하는 잔인함의 강도는 더욱 높을 것이다.
4월의 잔인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우선 4·29 재·보선만 놓고 보자. 성 회장 리스트의 여파로 벌써부터 여당의 텃밭이라는 인천서·강화을 지역 재선거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하니 출마자가 느끼는 잔인함은 여느 선거와 남다를 것이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이번 재·보선에서 여당이 0대 4의 참패를 할 수도 있다는 예상도 나오고 있으니 선거판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4월은 그야말로 잔인함 그 자체다. 거기에 정부가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공무원연금법과 노동시장 개편을 위한 추진하는 노동 개혁에 해당하는 이들도 4월의 잔인함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4월이 빨리 지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들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과 움트는 새싹을 보며 희망을 노래하고 미래를 꿈꿔야할 봄 4월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