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즉위하고 6년째 되는 해 큰 가뭄이 들었다. 그러자 정조는 그해 5월22일 다음과 같은 윤음(綸音) 즉,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보리는 이미 흉년을 고하였는데 모내기도 또 시기를 어기게 되었으며 논밭의 도랑은 모두 말라서 거북 등이 되었고 샘물도 또한 말랐으니, 당장 애타고 황급한 상황이 마치 불에 타는 것 같다. 전국의 가뭄 가운데 경기지역이 가장 극심하고 혹독하다. 특히 왕실과 가까워 더욱 나의 부덕함이 환히 드러났으니, 하늘이 경계를 고한 것이 분명하기 그지없다. 물줄기는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그림자는 드러난 외표에 연유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뭇 신하들의 잘못이겠는가? 첫째도 과인 탓이요 둘째도 과인 탓이니, 하늘의 큰 노여움을 당하고도 스스로 풀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을 위한 방도는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한마음으로 구습(舊習)을 고쳐 새롭게 하기를 도모하는 것이다. 내가 바야흐로 두려워 마음이 편치 못한 관계로 자숙한 다음, 교외(郊外)로 나아가 이틀밤을 지내고 몸소 희생(犧牲)에 대신하는 거조를 행함으로써 신기(神祇)에게 은혜를 받기를 바라겠다.’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앙이 모두 임금인 자신의 탓이며 하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직접 나서겠다는 뜻을 백성에게 고한 것이다. 이처럼 왕, 혹은 대신들이 나서 기우제를 지낸 기록은 조선 왕조 실록에만 100여차례에 이른다 시기로는 음력 4월에서 7월 사이로 거의 연중행사로 열렸다. 그만큼 매년 가뭄이 들었다는 애기다.
조선시대가 농경사회인 만큼 가뭄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지고 농작물이 타들어가는 것은 어린 자식이 열병 앓는 것만큼이나 못 견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가뭄이라는 재앙이 닥치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여서다.
최근 경기도를 비롯한 전국의 가뭄이 매우 심각한 모양이다. 강수량이 전년대비 절반에도 못미치고 저수율도 40녀만에 최저치라고 한다. 가뭄비상대책반을 운영하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여기에 ‘메르스’까지 덮쳐 타는 목마름을 더하고 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정준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