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는 필연적으로 강함을 추구하게 된다. 상대보다 빠르고 강한 움직임을 통하여 일격에 제압하는 것이 모든 무예를 수련하는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그 단 한방을 위해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수련을 하게 된다. 그래서 무예를 수련하면 점점 더 몸과 마음이 단순해진다. 이는 무예 뿐만 아니라 신체 활동을 한계에까지 몰아치는 모든 행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만약 머리 속이 복잡해지면 반응시간이 더뎌지거나, 그 흐름이 무너질 수 있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속 마음을 비워내야만 한다. 특히 무예의 경우 상대의 움직임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복잡하게 이것저것을 계산할 것도 없이 거의 본능에 가깝게 몸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필살기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움직임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러하듯이 모든 것이 강하고 분명하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강인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많다. 신체적으로 보면 관절부위가 대표적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체의 능력도 위축된다. 보통 관절의 경우는 오랜 세월동안 쉼 없이 마찰을 일으키기에 다른 어느 곳보다 빨리 그 수명이 줄어들게 된다. 특히 무예 수련의 경우 순간적으로 강력한 힘을 얻어 내기 위하여 관절에 상당히 많은 무리를 주는 자세가 많다. 주먹으로 상대를 치는 자세의 경우도 단순히 주먹의 힘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깨와 등근육 및 허리는 물론이고 두 다리의 비틀림을 더해야만 강력해지기에 전신의 관절에 상당한 무리가 온다. 그 엄청난 압박을 견뎌내며 수천 아니 수만 번의 동일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수련이기에 무예수련은 어찌 보면 관절에 치명적인 해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주변에 체육관을 운영하는 무예관장들의 대부분은 사지관절 중 하나 정도는 치명적인 손상을 가진 경우가 많다.
신체적인 강인함뿐만 아니라 심적인 강인함도 때로는 화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빠르고 단순함을 육체적으로 강조하기에 성격 또한 그렇게 변화한다. 필자 또한 반평생이 넘는 세월을 칼과 함께 지냈기에 상당부분 칼쓰는 것과 닮아 있기도 하다. 옳고 그른 것, 혹은 원칙과 무원칙의 사이에서 칼로 두동강 내듯이 의사결정을 내리고 후회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기준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함에도 내 몸과 마음이 먼저 극렬하게 반응하기에 생긴 일들인 것이다. 부족하지만 요즘에서야 강하고 빠른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내안에 자리잡아 가고 있다.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시조인 노자(老子)의 ‘덕경(德經)’ 제76장 ‘계강(戒强)편’을 보면,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人之生也柔弱(인지생야유약):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其死也堅强(기사야견강): 죽은 사람의 몸은 굳고 단단하다. 萬物草木之生也柔脆(만물초목지생야유취): 살아 있는 만물과 초목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其死也枯槁(기사야고고): 죽은 모든 것은 말라 딱딱하다. 故堅强者死之徒(고견강자사지도):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은 것이고, 柔弱者生之徒(유약자생지도):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산 것이다. 是以兵强則不勝(시이병강즉불승): 군대가 강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木强則共(목강즉공): 나뭇가지가 강하면 부러지고 만다. 强大處下(강대처하): 굳고 강한 것은 아래에 있고, 柔弱處上(유약처상):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지극히 단순하다. 굳어지고 딱딱해지면 죽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강함만을 믿거나 혹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지나치게 내세우면 부러지고 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오로지 승리만을 쟁취하려는 군대도 지극히 강함만을 추구하면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단 한번의 패배 또한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기에 긴 안목으로 전략과 전술을 풀어 나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강풍에 고목은 뿌리째 뽑혀 나가기도 하지만, 한해살이 풀인 갈대는 그 바람을 따라 때로는 누웠다가도 햇살이 비추면 다시금 제자리를 찾는다. 세상사가 극한을 꿈꾸는 무예의 대결이 아니기에 가끔은 부드러워지는 것도 순리에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언제즈음 부드러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 유함이 필요한 때임을 직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