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는 2015년 ‘인천 가치 재 창조’를 지향하고 있다. 인천의 가치는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발견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문학산 기슭에 미추홀을 첫 도읍으로 정한지 203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문화의 흐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문학산 아래 작은 분지에서 출발했던 인천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천의 지명도 여러 차례 변화해 왔다. 물의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미추홀(彌鄒忽), 매소홀(買召忽)에서 고려시대 왕실과 관련된 의미가 내포된 경원(慶源), 인주(仁州), 경원부(慶源府)를 거쳐 조선시대 태종대(1413)에 이르러 비로소 인천(仁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지난 2013년은 인천이라는 이름이 탄생한 지(定名) 600년이 되는 역사적 분기점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인천과 같이 이러한 지방제도의 개편과 변화를 경험했던 전국의 여러 지역 중 오늘날 인천광역시처럼 발전한 곳은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개항과 더불어 전개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의 여러 정치적 사건과 사실들,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양호사건(1875), 임오군란(1882), 인천 개항과 열강과의 조약체결(1882~), 갑신정변(1884), 청일(1894)·러일전쟁(1904)으로부터 인천상륙작전(1950)에 이르기까지 인천항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공간이었다.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이나 탑골공원보다 먼저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대불호텔과 각국공원(1888), 경인철도부설(1899), 하와이 이민(1902), 팔미도 등대(1903), 유일의 인천항 갑문(1918) 등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에 해당하는 역사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인천은 근대문화의 선구지 역할도 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특히, 6·25전쟁 시기에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시련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남겨 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나마 가까스로 일구어 가던 경제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더구나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이었고, 휴전(1953) 후 26만여명의 인구 중 7만5천여명의 피난민까지 수용했던 인천사회는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은 인구 100만명을 돌파해 인천직할시로 승격했다(1981). 그리고 세계화·정보화의 추세와 중국의 개방화 정책으로 인천지역의 지정학적 비중이 더욱 높아지자 지방자치제 부활(1991)과 연계해 인천광역시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1995).
광역시정을 펼친지 20년이 되는 2015년, 지금도 인천의 발전은 진행 중이다. 어려운 재정문제와 수도권매립지의 바람직한 해법 등 여전히 산적한 현안사항들이 있다. 고려후기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를 제2수도로 팔만대장경의 조판을 통해 이민족에 대항했던 정신력도, 조선시대 왕실의 보장처로 외규장각, 정족산사고를 통해 기록문화를 지켜냈던 끈기도, 조선 후기 강화학파가 실용적 자세로 민족정신을 지켰던 것도, 일제강점기의 질곡과 6·25전쟁에서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인천인의 개척적 도전정신이었다.
가치를 재 창조한다는 것은 기존에 이미 인식되었던 사실들을 재정립하고 현재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해본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옛 것을 근본으로 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과도 일맥상통하는 의미이다. 이제 우리 모두 “내사랑 인천”을 외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