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세계문화유산 추진 문제를 두고 이웃나라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분명한 월권이다. 그런데 일본이 메이지 시대 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하자 이웃나라인 한국이 이를 간섭하고 양국의 기싸움이 시작됐다. 우여곡절 끝에 하시마 탄광 등 일본 근대산업시설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과 일본이 강제징용에 의한 강제노역을 명기하는 문제를 놓고 등재심사를 하루 연기하는 등 공방을 벌인 끝에 합의를 이룬 것이다. 일본 정부 대표단이 강제노역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세계유산위원회가 이를 주목한다는 주석을 등재 결정문에 달아놓는 방식이다.
한국이 이웃나라인 일본의 문화유산 등재문제에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일본은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시기를 1850년부터 1910년까지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을 해서는 안 되지만 참 여우같은 짓이다. 왜냐하면 이때는 일본이 우리나라 등 주변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즉 강제징용 사실을 감추기 위한 ‘꼼수’였던 것이다.
이번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23군데 중 조선인 징용자가 투입됐던 곳은 하시마 탄광 등 7곳이다. 무려 5만8천여 명이 이것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특히 하시마 탄광은 조선인 징용자들이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고 해 ‘지옥도(地獄島)로 불릴 정도였다. 일본의 움직임에 우리나라는 “강제징용 등 인권 침해의 역사를 외면한 채 등재가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여러 경로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위원국 등에 전달했다.
결국 일본의 의도와는 다르게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권고 보고서’에서 이들 시설에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문구를 포함시켰다. 또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일본은 위원회 발표문을 통해 ‘한국인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강제징용 됐다’는 내용을 밝혔다. 아울러 등재 결정문에는 일본의 발표를 주목한다는 주석을 추가함으로써 국제사회 논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미증유의 끔찍한 학살 장소였던 아우슈비츠도 세계유산이다. 다시는 이와 같은 참극을 겪지 말자는 반성과 교훈을 위해 등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혹독한 고통을 당한 조선인 징용자들의 참상을 외면하려 했다. 따라서 ‘주석’에 포함된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