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이냐, 경미한 증상이냐, 차이가 있을 뿐이지 현대인은 누구나 분노 조절장애를 갖고 있다고 한다. 당장 나부터 어제 경험했다. 출근 전 혼자 계시는 어머님 댁에 가기 위해 오전 일찍 집 앞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지난주일, 연로하신 탓인지 여기저기 몸이 불편하시다는 얘기를 듣고 안부도 살피고 이것저것 얘기도 나눌 겸 나선 것이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아 잘못 탔구나’라고 느낀 것은 10여분이 지나서였다. 평소 가던 코스가 아닌 엉뚱한 노선으로 가고 있어서였다. 버스 번호는 안 보고 안내판 끝에 있는 수원역이라는 문구만 보고 탄 것이 화근이었다. 중간에 내리려고도 했다. 하지만 모르는 노선으로 달리는 바람에 수원역 근처까지 가보자는 속셈으로 버텼다. 그리고 간선도로 곳곳을 지나 수원시내를 거의 한 바퀴 돈 뒤에야 목적한 곳에서 내릴 수 있었다. 시간도 두 배 이상 걸렸다.
타고 가는 내내 속이 끓었다. 신경질과 내 자신의 우매함을 탓하는 화가 뒤엉켜 마음도 편치 않았다. 짜증도 났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정신을 어디 두고…’를 되뇌며 자책해 보지만 짜증을 해소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주위마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짜증과 시비로 이어지는 싸움이 왜 발생하는지도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이처럼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 치미는 분노와 짜증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현대사회는 본인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타인 때문에, 특히 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불합리한 제도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짜증과 분노를 유발시키고 있어서다. 덕분에 삶의 피로도도 가중되고 있다. 심리학자들이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로 정의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짜증도 많고 분노도 많다. 종류도 갖가지다. 오죽하면 묻지마 살인, 폭행, 방화 등 끔찍한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상처도 깊다. 마음의 내상이 깊으면 이유 없는 우울증도 생기고 맹목적인 분노 충동도 일어난다. 문제는 마음의 요동을 쉽게 누그러뜨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절제나 조절이 안 되니 마음의 자유가 없다. 자유가 없으니 마음의 평화는커녕 평온한 마음마저도 얻기 힘들다.
이럴 땐 으레 치미는 것이 있다. 화(禍)다. 잘 알다시피 화가 많이 날 때면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만약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화가 가라앉은 후에 해야 한다. 그래야 실수와 실패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굳이 옆집 텔레비전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며 이웃을 살해했다던 얼마 전 보도를 인용하지 않아도 그렇다.
성숙한 사람은 화(禍)의 상황을 다루는 지혜가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지혜는 다시 말해 화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다스리는 기술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이 화를 낼 때 대꾸를 하지 않는다. 특히 부부간에 어느 한 사람이 이렇게 할 경우 더 이상 싸움이 진행되지 않기도 한다. 때로는 침묵하는 상대방이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혜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엔 배려에 대한 고마움으로 화가 누그러지기도 한다. 이런 것이야말로 상대방이 내는 화를 더 자극하지 않고 지혜롭게 다루는 기술이 아닌가 싶다.
미국의 의학자 엘머 게이즈 박사는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사람의 호흡의 액체를 냉각시켜 색깔을 보았더니 화를 많이 낼 때는 밤색, 슬플 때는 회색, 기쁠 때는 청색의 빛깔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화를 내고 있으면 몸에 많은 독소가 발생하여 온몸에 퍼지게 된다는 것도 알아냈다.
하지만 이 같은 발견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화를 낼 때의 날숨을 냉각시킨 뒤 증류수에 타서 쥐에게 주사했더니 그 쥐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화를 내는 호흡의 독을 분석해 보니 80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성분이 검출됐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지만 인간인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신은 화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도 함께 주신 모양이다. 성경엔 이런 구절이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