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 수련의 기본은 동일한 자세의 반복이다. 처음에는 어설픈 몸놀림이지만, 동일한 움직임의 반복을 통해서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자세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치열하게 수련을 진행했다면 어제의 자세와 오늘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어제의 몸짓과 오늘의 몸짓이 같다면 그것은 오히려 퇴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예 수련은 흐르는 강물에 배를 띄우는 일이다. 쉼 없이 노를 젓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 멀리 흘러 가버리고 만다. 정확한 움직임과 목표의식이 없다면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종국에는 난파선처럼 표류하게 된다. 좋은 스승의 역할은 물살이 거칠수록 빛을 보게 된다. 온 힘을 다해 물길을 거슬러 오를 때 좀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도록 풀어내 주는 것이 좋은 스승인 것이다. 이러한 스승의 차별화된 가르침을 ‘노하우(Knowhow)’라고 부른다.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전수하는 것이 스승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좋은 스승을 만나면 보다 빠르게 무예의 요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승이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10년이 걸렸다면, 제자는 2~3년 안에 그 오랜 경험을 몸을 통해 전수 받을 수도 있다.
스승도 수련생의 그릇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부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수련생의 그릇이 변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채워 줄 수가 없다. 그릇의 크기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형태에 따라 채워줄 수 있는 내용물 또한 달라진다. 어제까지는 동그란 원형의 내용물을 채워줬다고 할지라도, 그 그릇이 삼각형으로 변화하면 그 형태에 맞는 흐름을 전수하게 된다. 또한 사람마다 신체능력과 수련의 양이 다르기에 스승은 동일한 이야기를 할지라도 결과물은 달라진다. 심지어 가끔은 의도적으로 다른 형태의 흐름을 채워주기도 한다. 일종의 시험이기도 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살피는 장인 것이다.
이때 무예 수련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은 노하우가 아닌 ‘노화이(Knowwhy)’다. 도대체 그것이 왜 그렇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물음 없이 수련을 진행하게 되면 실력은 더 이상 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자주 듣는 용어 중 ‘육하원칙’이라는 말이 있다. 신문기사에서 반드시 들어 가야할 내용인데, ‘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라는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내용으로 글을 전개해야 사실성을 높일 수 있게 된다. 이중 ‘왜’를 제외한 나머지는 지극히 사실적인 것으로 제 3자의 눈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왜’라는 부분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기에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당사자일지라도 입으로 내뱉은 내용과 본심이 다를 수도 있기에 ‘왜’를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기까지 한다.
수련의 공이 높아지는 수련생일수록 스승이 채워주는 내용물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새로워질 수 없다. 단순히 주먹을 한번 지르거나, 칼을 한번 뿌리는 움직임에도 ‘왜?’라는 의미를 새기지 않으면 그저 단순 노동으로 흘러버릴 수도 있다. 한 자세, 한 호흡까지도 그 의미를 새기고 풀어가야만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예에서 100명의 제자를 제대로 가르쳤다면, 100명의 움직임이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옛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스승께 배운 것들을 그대로 익히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신체학문인 무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나 예술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무리 천재적 소질을 갖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발전적 고민 없이 작품을 만들어 간다면 그 어찌 새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새로움은 어렵고도 힘든 일이기도 하다. 만약 스스로 새롭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은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쉼 없이 그 새로움을 도전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