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선배들 사이에선 얼마 전 모 방송에 출연해 앞으로 2년을 더 일하고 98세 되는 해에 사랑하는 짝을 찾아보겠다고 한 96세의 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말이 화두다. 어제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난 선배 한 분도 이런 이야길 했다. 우연히 본 텔레비전 재방송에서 김 교수의 인터뷰를 들었는데 처음엔 농담으로 받아들였으나 말하는 표정이나 표현이 너무 진진해 감동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20년 넘게 병수발한 아내가 먼저 떠나고 10년 넘게 홀로 사는데 지금은 일 때문에 사랑을 못하니까 일을 마친 뒤에 사랑을 하고 싶다는 대목에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얻지 못했지만, ‘나도 저 나이가 돼서 김 교수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자신에게 반문했다고 한다.
한국 철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김 교수는 96세인 요즘도 곳곳에서 강의를 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책도 집필하는 등 나이에 관계없이 자신의 일을 왕성하게 하는 인사로 유명하다. 1960~1970년대 학생들 치고 김 교수의 철학과 인생론에 관한 책 한 권 안 읽은 이가 없을 정도며, 그 책을 보며 감동받았던 학생들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한 김 교수를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고 이야기 한다.
강의와 저작활동을 하면서 풍성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김 교수의 ‘희망과 꿈’. 과연 김 교수 혼자만 갖고 있는 생각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다만 여건이 맞지 않고 생각은 있으나 실천할 자신이 없을 뿐이지 마음속엔 항상 미래를 향한 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어서다.
나이 먹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 건강이 따라주질 않고,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일인데 그런 일을 은퇴 없이 인생마지막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을 떠나 축복이다.
영국의 인구 사회학자 ‘피터 라슬렛’은 1989년 출간한 ‘인생의 새로운 지도’란 책에서 ‘제3기(期) 인생(The Third Age)’이란 개념을 체계화한 학자로 유명하다. 라슬렛은 인간의 삶을 4기로 구분했다. 태어나서 취업할 때까지가 제1기, 취업해서 퇴직할 때까지가 제2기다. 퇴직해서 건강할 때까지가 제3기이고, 건강을 잃고 죽을 때까지가 제4기다.
라슬렛은 제3기야말로 개인적 성취의 시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제2기 인생은 불가피하게 떠맡게 되거나 목적의식 없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대로 계획을 세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시기는 사실상 제3기뿐이란 것이다. 아마도 김 교수는 이 같은 3기 인생의 축복을 받은 특별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지지 않는다면 찾아 할 수 있는 것 또한 3기 인생이기도 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3기 인생을 대비해 열심히 노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00세인이 많은 세계적 장수촌 4곳을 직접 취재해 ‘블루존’이란 책을 쓴 작가 ‘댄 부에트너에’는 블루존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은퇴란 개념 없이 평생 일하는 것이라 썼다. 나이 들었다고 편히 쉬는 것이 아니라 요리하고, 청소하고, 증손자들 돌보고, 정원을 가꾸는 등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했기 때문에 장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96세에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하는 건강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건강 비결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건강 비결입니다. 친구들과 누가 더 건강한가를 가끔 이야기하는데 그 기준이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가 입니다. 저도 50대까지는 그저 일만 열심히 하느라 건강은 신경도 안 썼습니다. 그러다 50대 후반에야 운동이나 하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후 30년이 넘게 매일 운동을 합니다. 운동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하고, 건강은 결국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느 철학자가 했다는 ‘젊음은 자연의 선물이지만, 노년은 자신이 만든 예술작품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