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션, 대중음악 등 대중들에게 친숙한 장르가 예술의 테두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예술의 경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장르가 만화인데, 올해 수많은 작가들의 원화가 전시 공간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브리 스튜디오 전시회와 해외 일러스트 작가들의 원화전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마당에, 만화를 전시회장에서 접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화이트큐브로 초대받은 만화 전시들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전시들이 상업적인 데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고 있으며,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의미에 목적을 두고 있고, 이 전시들을 통해 만화의 새로운 발견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코 미술관에서는 2014년 ‘박흥용 만화_펜 아래 운율, 길 위에 서사’라는 전시를 열었었다. 박흥용 화백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영화화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진 작가이다. 그전까지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만화가들 사이에서는 ‘만화가 중의 만화가’, 존경하는 인물로 추앙 받아왔다고 한다. 그는 상업만화의 형식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주제와 형식을 추구하는 작가이다. 시적이고 철학적인 대사와 여백이 살아나는 공간의 구성은 작가만이 지닌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그를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로 선정한 이유를 들어 진정한 ‘작가주의’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박흥용 화백의 작업을 시각미술의 한 범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이유가 전시 기획의 발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전시는 만화를 미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의 한 장르로서 바라볼 수 있도록 물꼬를 텄다.
한편, 분명한 사회적 발언을 통해 만화가 지닌 사회적인 파급력을 실감케 해주는 전시들이 있다. 2014년 박재동 화백이 세월호의 사고로 희생된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그린 작품을 대했을 때 만화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가까이 담을 수 있는 장르인지를 실감했다. 그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이 아이들의 사진을 똑바로 보는 것도 어려웠지만 막상 아이들의 표정과 헤어스타일을 자세히 보다 보니 원통한 느낌이 조금씩 사그라지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박재동, 이희재, 박건웅 화백을 포함하여 140여명의 만화작가들이 이 전시에 함께 했으며, 제주, 광주, 부산, 부천, 광화문에서 전시되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할 만화전시가 있는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지지 않는 꽃’이다. 이 전시에도 박재동 화백이 참여하였고, 이현세, 김광성 화백을 비롯하여 22명의 만화가가 참여하였다. 현재 경주문화예술의전당에서 전시가 되고 있으며 그 전에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전시가 되었었다. 19명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한 작품들은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현실을 담고 있다.
만화니까 가능한 표현들이다. 만화라는 장르가 지닌 친화력과 서사구조는 우리 사회의 민감한 부분, 가슴 아픈 치부를 능히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만화 작품들이 우리 사회가 지닌 이슈들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과거의 민중미술 작품들과 판화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폭력적인 영상물에 중독되어 가면서도 진짜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는 눈을 감아버리는 우리의 약한 모습이 이 전시들을 통해 조금은 치유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금까지 미술 전시장을 방문한 만화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사실, 무엇이 예술이 될 수 있고 무엇은 예술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한 논란은 이미 현대 미술에서 무색해진지 오래이다. 리히텐슈타인이나 이동기의 작품에서 만화는 아무런 수치심을 가지지 않고 캔버스를 점령하곤 한다. 팝아티스트들은 이 심각한 주제를 재미있게 가지고 놀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 밖의 장르가 화이트큐브로 새롭게 초청될 때마다 우리는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특히 최근 화이트큐브에서 만나볼 수 있는 만화전시의 경우 그 취지가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