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것이 무예라고 하면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조선시대에는 조총을 쏘는 것이 무예의 한 종목으로 인정되었다. 대표적으로 조선후기 무관을 뽑는 무예시험에서 조총을 쏘는 방포술은 핵심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당시 총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해서 총기 자체의 성능보다는 이를 다루는 사람의 능력을 더 중요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몇 명이서 함께 조를 이뤄 쏘는 총통(대포)과는 달리 개개인이 조총을 가지고 빠르게 사격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했기에 무예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허수아비나 표적을 쏘는 것은 기본이고 일정 정도 거리에 있는 참새를 쏘아 맞추는 시험을 군영에서 진행했을 정도로 실제 사격능력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당시 사격에 활용한 화약제조법에 대해 살펴보면 이렇다.
조선시대에는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질산칼륨)을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이는 흙에서 얻는 것으로 당시에는 취토법(取土法)이라고 해서 특수한 흙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흙에도 맛이 있다. 그 중 화약에 사용하는 흙은 그저 맹맹한 일반 흙이 아니라, 일정한 숙성 과정을 거친 짠 흙(일명 함토)과 매운 흙(일명 엄토)에서 추출해야만 했다. 문제는 이런 흙은 아무곳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애매한 곳에 주로 많았다. 예를 들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의 마루아래나 화장실 근처의 흙은 최고의 화약재료로 각광을 받았다.
당시 화약 재료를 수집하는 부대가 별도로 존재했는데, 취토군(取土軍)이 그들이다. 취토군은 흙을 파는 도구와 수레를 가지고 이집 저집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달려들어 할당량을 채워야만 했다. 그런데 집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취토군을 싫어했다. 아무런 약속도 없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처마 밑과 화장실의 흙을 몽땅 퍼가니 굳게 다져진 마당이 비라도 한번 오면 진흙탕으로 변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토군이 올 때 즈음이면 미리 마당 가득히 모래를 깔아 버리거나 권세가 좋은 사람들은 미리 사전 답사를 나온 화약담당을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 패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화약을 만드는 일은 국가방위와 직결되는 문제라서 국왕이 직접 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취토군들의 하소연이 높이지자 국왕이 직접 화약제조를 위한 특별 취토령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광해군 때에는 당시 가장 강력한 군권을 유지했던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도성안의 각 지역을 무작위로 나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취토를 하라는 군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만약 이를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 그대로 군령으로 엄히 다스리겠다는 선포였다. 집의 크기에 비례해서 초석의 양을 결정하고 군사들을 시위군으로 동원해서 취토군들이 작업을 했는데, 비가 오거나 흙의 성질이 안 좋은 곳도 많아서 할당량을 채우기는 늘 힘들었다. 그래서 비상시에는 국왕이 살고 있는 궁궐의 처마 밑이나 화장실 근처의 흙도 죄다 퍼내어 화약재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구해진 흙은 곱게 태운 재를 섞어서 물에 녹이는 과정인 ‘사수’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후 이를 가마솥에 넣고 끓였다가 채에 걸러 고운 침전물을 모아 끈적끈적한 아교로 뭉치게 된다. 그런데 흙의 양에 비교해 보면 실제로 사수과정을 거쳐 나온 초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었다. 지금으로 치면 덤프트럭 한 대의 양을 정제하면 밥공기 하나 정도 나올까 말까였다. 그러니 수 백근의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산더미 같은 흙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모아진 초석에 유황과 재를 적당히 섞어서 쌀뜬물에 부어 절구에 넣고 부드러워 질 때까지 반죽하면 그것이 바로 화약이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총 한발을 발사하기 위해 들어가는 적은 양의 화약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화약을 모두 만들고 나서는 사각형으로 낱개 포장을 해서 반드시 만든 장인의 이름을 쓰게 했다. 그래서 만약 만든지 5년 안에 화약이 맹렬하게 터지지 않으면 해당 장인에 대하여 잡아다가 곤장세례를 하고 다시 만들도록 했다. 실명제다. 요즘 매체를 통해서 군사훈련 중 불량이 나오는 전차, 미사일 등의 무기가 많다는 소식이 자주 들린다. 조선시대에도 군수물자에는 실명제가 적용되었다는 것은 바로 책임의 문제를 명확히 한 것이다. 부디 좀 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군의 전투력 및 사기와 직결되는 군수물자 제작에 정성을 기울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