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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숙

시인
▲ 한인숙 시인

 

깨를 볶는다. 구수함이 물 위로 둥둥 떠다닌다. 누릇누릇하게 볶인 깨를 몇 번이고 헹궈내며 조리로 건망증도 함께 걸러낸다.

며칠 전 수확한 깨를 깨끗이 씻어 말려 두었는데 깨를 볶으려고 찾아보니 서랍장에서 나온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무심코 깨를 볶았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깨를 손으로 으깨어 적당히 볶은 후 용기에 담았다.

통깨로 사용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깨소금을 만들지는 않았다. 입맛이 없다며 국수를 비벼먹자는 남편의 말대로 국수를 삶아 비빈 후 낮에 볶아놓은 깨를 넉넉히 넣었다. 맛있게 국수를 먹던 남편이 국수가 으적거린다며 수저를 놓는다.

나도 같이 식사를 했지만 괜찮았는데 뭐가 으적거린다고 식사를 하다마느냐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좀 까칠한 식성이라 별로 신경을 안 썼던 것도 사실이다. 김치를 냉장고에 넣다보니 냉장고 한 켠에 볶지 않은 깨가 있다. 아차 이건 또 뭔가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낮에 볶은 깨는 봄에 파종하고 남은 참깨가 창고에 있어 들여다 놓은 것이었는데 씻어 말려놓은 참깨와 양이 비슷하여 잘못 볶은 것이다. 파종하고 남은 씨앗이다 보니 흙도 섞였을 테고 으적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걸 어쩌나 싶어 궁리했다. 아깝지만 그냥 버려야하나, 다시 씻으면 고소함이 다 없어지는 건 아닌가 하루를 고민하다 차마 버릴 수 없어 다시 씻기로 했다. 물에 담그니 가라앉아야 할 깨가 모조리 떠올랐다. 조리로 떠오른 것들을 먼저 건져내고 흙과 이물질을 걸러냈다. 흙과 모래가 꽤 많이 가라앉았다, 몇 번을 씻은 후 다시 볶았다. 이미 볶았던 깨라 불에 닿으니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젖었던 깨에 물기가 걷히면서 허연색이 되살아났다.

누릇누릇하고 고소한 냄새도 진동하니 얼마나 더 볶아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검은 깨를 볶을 때는 검은 깨 속에 흰 깨를 조금 섞어서 흰 깨가 누릇누릇하게 볶여지는 것을 보면서 검은 깨가 잘 볶였는지 확인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팔순의 노모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으시겠지 싶어 씁쓸했다.

볶은 깨를 다시 씻어 볶으면서 내 건망증도 함께 볶았다. 툭툭 튀어 오르는 깨가 내 젊은 날의 팔팔함 같았다. 삼십 대까지만 해도 웬만한 전화번호나 가정의 대소사 심지어는 이웃집 행사까지도 기억해 낼 정도로 총기가 좋았는데 어느새 옛말이 되어 버렸다.

부지런히 베란다에 가서는 왜 베란다에 왔는지 몰라 다시 돌아서고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뭘 찾던 중인지 생각하고 물건을 잘 둔다고 둬 놓고는 몇 날 며칠 찾아 헤매는 일이 다반사다.

아직 그렇게 깜빡거릴 나이는 아닌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내 머리는 자주 형광등이 되곤 한다. 메모하지 않으면 돌아서면 잃어버린다. 내 안에 너무 많은 공해를 담고 살아서 일까 아니면 적당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들어서일까 머잖아 나의 가장 강력한 적은 건망증이 될 것이다.

고소함은 덜 하겠지만 두 번 볶은 깨를 먹을 때마다 정신을 차리자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에게 다짐을 구하지만 언젠가는 다짐을 구하는 마음조차 잃어버릴까 두려움이 앞선다. 희끗해진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면 다시 까매지듯 구멍 난 정신을 가다듬어 세월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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