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지면을 통해 그동안 정조의 건축을 순서대로 살펴보다 보니 현재는 존재하지 않은 건물들이 대상이 되었다. 전편에서는 부용정의 외부뿐 아니라 내부구조적인 부분도 변함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고, 방화수류정과 비교하여 온돌의 설치 가능성을 대하여 추정해보았다.
추정한 내용처럼 온돌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을까? 강릉 선교장의 앞에 있는 연못에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활래정(活來亭, 1816년)도 부용정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이곳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활래정’이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따온 것으로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다.’는 의미가 있다. 연못의 안에는 ‘봉래선산’이라는 섬이 있다. 정조가 짓은 부용정 상량문에도 ‘이곳 봉래신선의 구역에 물가궁전을 짓는다.’라고 하여 두 곳 모두 봉래신선의 구역이라고 하고 있다. 또 선교장의 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 신선이 기거하는 그윽한 집)’란 현액이 있어 주인이 신선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정조 역시 ‘부용정에서 앉아 있으면 군자가 된 느낌’이라고 하여 건물 주인이 바로 신선이라는 주장도 같다. 건물배치와 형상도 닮은 점이 많다. 방지(方池)에 기둥을 담그고 있는 것과 정자의 사방 벽이 창호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다.
활래정은 연못 방은 마루고 나머지 방은 온돌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온돌방의 아궁이는 연못방의 하부를 이용하여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처리하였다. 정조가 부용정에 온돌방을 설치했다면 아마 활래정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며 굴뚝은 부용정의 남쪽 언덕에 자리했을 것이다.
내부구조 변경 가능성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자. 부용정은 외관상 동·서쪽이 좌우대칭 건물이다. 그러나 내부는 어칸(중앙칸)의 가지방(加地枋: 창호를 내기 위해 하부에 댄 지방으로 머름과 같음)은 서쪽 편에는 있고, 동쪽에는 없어 비대칭이 되고 있다.
국왕이 북쪽에 앉아 남향하므로 남쪽이 출입이라면 동·서쪽에 가지방을 설치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주합루까지 이르는 축(軸)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만약 주 출입이 남쪽이 아닌 동쪽을 설정했다면 대칭형 평면이 보다는 동쪽 퇴칸을 연장해 출입의 여유 공간을 확보했을 것이다. 외형적인 부분과 내부의 구조가 서로 일치하고 있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부도 외부처럼 대칭구조였다면 어칸의 동쪽에 있는 대형 불발기문 역시 서쪽창호와 같고 가지방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부용정의 건축적인 부분에서 평면은 어칸과 4면에 연접한 마루방이 있고 그 외부에 쪽마루가 있어 3중 공간으로 되어 있다. 출입은 동·남·서쪽에 있는 계단을 이용할 수 있고, 북쪽은 연못과 접해 출입할 수 없다. 부용정의 정면은 남쪽이며, 북쪽으로 가면서 위계가 상승한다. 어칸과 연못 방은 하나의 영역으로 구획되었으며, 창문은 아(亞)자 살로서 다른 칸의 띠살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고, 연못 방은 다른 곳보다 약 1자 정도 높아 이 공간을 특별한 장소로 계획된 것을 알 수 있다.
건물의 크기에서 4방향이 각각 3칸이며, 면적은 5.5칸으로 약 9평이다. 어칸의 한 변 길이가 8자이며, 연못 방은 남북길이가 8.5자이로 어칸보다 길었고, 퇴칸의 짧은 쪽은 6.5자로 어칸보다 짧았다. 방들도 공간의 위계에 따라 다르게 계획되어 있었다.
공포는 이익공 구조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지붕에는 최근에 복원된 절병통과 취두가 있는데, 이는 동궐도를 근거로 하였으며, 절병통은 같은 시기에 건축된 수원화성의 방화수류정을 참고하고, 취두는 주합루와 서향각을 참고하여 제작하였다.
정조에 의해 건축된 부용정은 2012년 해체 공사로 인해 여러 가지가 당시 건축기법보다 훨씬 뛰어난 기법들이 사용된 것이 밝혀졌다. 특히 최고의 걸작은 기둥과 주두의 연결부로, 일반적인 방법은 기둥이 주두의 하부에서 끝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기둥의 4괘가 주두를 뚫고 나와 이익공의 바닥면보다도 더 높게 올라가서 이익공까지 결구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처음 발견된 것이며, 여기에 들린 공력은 가히 놀란 만하다.
부용정은 작은 건물이지만 부재의 맞춤에서도 정조의 힘이 느껴진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문화재가 잘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