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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주합루(上)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의 건물 중 가장 권위 있는 것은 중층건물의 주합루(宙合樓)로 연못의 북쪽 언덕 위에 자리하여 웅장하며 늠름한 모습으로 부용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금은 이 건물을 ‘주합루’라고 하지만 창건 시기에는 규장각(奎章閣)으로 더 많이 불렸다. 창건 당시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 역할의 규장각이고, 2층은 역대 임금의 어제, 어필, 어진을 보관하는 어제각(御製閣) 용도의 주합루였다. 이후 규장각은 역할이 확대되면서 창덕궁 서쪽의 금호문 근처로 이전하게 되어, 주합루(어제각)만 남게 되면서 건물의 명칭도 주합루로 불리게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건축 사업을 추진한 것이 어제각의 설립이었다. 이는 정조가 폐위된 사도세자의 아들로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즉위하였기에 본인이 선왕인 영조의 적통(嫡統)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이며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에 우선하여 추진되게 된 것이다. 주합루와 규장각의 준공시기에 정조는 “우리 선대왕의 운장(雲章)·보묵(寶墨)은 모두 다 소자를 가르쳐 주신 책이니, 존신경근(尊信敬謹)하는 바가 어찌 보통 간찰(簡札)에 비할 것이겠는가? 의당 한 전각(殿閣)을 세워서 송조(宋朝)의 건봉(虔奉)하는 제도를 따라야 하겠으나 열조(列祖)의 어제·어필에서 미쳐 존각에 받들지 못한 것을 송조에서 각 왕조마다 전각을 달리하는 것과 같게 할 필요가 없으니 한 전각에 함께 봉안(奉安)하게 되면 실로 경비를 덜고 번거로움을 없애는 방도가 될 것이다. 아! 너 유사(有司)는 그 창덕궁의 북원(北苑)에 터를 잡아 설계 하라.”라고 하였다.(정조실록)

정조 즉위년(1776) 3월에 창설을 명하여 그해 9월에 완성되는데, 처음에는 특정한 명칭 없이 ‘어제각(御製閣)’으로 일컫다가 숙종이 쓴 편액 ‘규장각’과 정조가 쓴 ‘주합루’의 편액을 걸면서 이름을 갖게 된다.

본래 ‘주합(宙合)’은 관중(管仲, B.C.725~B.C.645)의 업적을 모은 책 ‘관자(管子)’의 주합편의 주제이며,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주합을 “천지를 풀무질하고 천지는 만물을 감싸주기 때문에 만물의 풀무라 한다. 또한 주합의 뜻은 위로 하늘 위에 통하고 아래로 땅 아래에 이르고 밖으로 사해(四海) 밖에 나가며, 천지를 뭉뚱그려서 한 뭉치로 만들고 흩으면 틈 없는 데까지 이른다.”하여 어제각의 이름으로는 더 없이 좋은 뜻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통합의 큰 뜻을 지닌 ‘주합루’란 명칭을 정조가 처음 이곳에서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조시기에 만든 ‘홍재전서’의 ‘경희궁지(慶熙宮志)’에 의하면 “흥정당(興政堂)은 신료(臣僚)들을 접견하고 강연(講筵)을 베푸는 곳인데, 회상전(會祥殿) 남쪽에 있다. 그 동쪽에는 석음각(惜陰閣)이 있고, 또 그 동쪽에는 존현각(尊賢閣)이 있는데, 역대 왕들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 강독(講讀)하던 집이었으나, 뒤에 폐해졌다. 금상(今上, 영조)이 경진년(1760)에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시고 나에게 명하여 이 각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이 각의 위에는 주합루와 관문루(觀文樓)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어, 정조가 세손으로 있기 이전부터 ‘주합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오년(1762)에 사도세자가 죽자 혜경궁은 세손(정조)을 보호하기 위해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보내는데 이때 세손의 나이가 11살이었다. 어린 세손이 건물명을 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주합루의 명칭은 정조가 세자가 되기 이전부터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합루의 용도는 창건 초기에는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정조 18년(1794)에는 새로 간행한 유교의 핵심 경전인 ‘사서(四書)삼경(三經)’을 보관하였으며. 순조 시기에서는 정조와 사도세자와 관련된 책들을 보관하였다. 그 후 헌종시기에는 정조뿐 아니라 여러 선왕의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을 보관하였다.

하지만 주합루는 어제각으로 선원전(어진을 보시는 궁전)과 같은 용도이기에 그 역할이 점차 약해졌으며, 고종 시기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창덕궁 주합루는 어제각 용도가 막을 내린다. 그 후 순종이 즉위하면서 창덕궁에 머물게 되는데 주합루를 연회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에서, 또 해방 후에는 권력자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 물론 민주화된 이후에는 용도가 없어졌고 지금까지 미개방시설로 남아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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