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은 내게
/김일영
이슬비를 함께 맞던 날 화단은
내게 조금의 자리를 내주었지
그곳에 축축한 시간과 말라가던 구근 몇 알을 심었다
얼마 후 아침이면
내 입은 꽃잎 모양으로 벌어지곤 했다
몇 번의 폭우가 침묵을 깨울 때마다
빗방울이 뚫다만 자리를 담배 필터로 메우곤 했다
여름을 키워낸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빌딩들을 건너가고
철 지난 봉숭아 한 잎 누구도 밟지 않는 빈집 마당에 떨어져
어둠 속에 감춘 길이 열리는 순간,
처음엔 이곳에서 나는 떠돌이였다
- 시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실천시선, 2009
이제 여름 끝자락입니다. 가을이 도둑처럼 다가서 있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여름을 키워낸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우리 곁에서 어느새 사라지고 없습니다. 조락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가을은. 그런데 또 한편 결실을 맺는 때이기도 하다는 뜻을 이 시는 새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시인은 새 보금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떠돌이였던 그가 화단 한 켠에 한 자리 마련하여 꽃을 피웠으니 말입니다. 빈집 마당 같던 시인의 마음은 늘 어두웠습니다. 거기에 빛으로 길을 낸 사람이 그립습니다. 누구나 처음엔 모두 다 떠돌이가 아니었나요? 수없이 울부짖었을 삶이 다시 몇 알 구근처럼 심어져 깨어나는 일이 우리가 걸어온 길 아닌가요? 그래서 폴 발레리는 이 가을에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말할 수 있었겠지요. /이민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