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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미국 불황기 속의 예술지원정책

 

극심한 경제 불황 속에서도 루즈벨트 대통령은 예술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시행했다. 미국 정부의 예술지원사업(WPA)은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공공부문 고용확대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조지 비들의 제안에 의해 1933년 시작되었고, 사업은 194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조지 비들은 경제 불황으로 인해 비참해져버린 예술가들의 삶에 통렬한 공감을 느껴 이와 같은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친구였던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영향을 받아 사업의 내용을 구상하였다. 당시 멕시코에는 대중들의 사회참여를 고무시키는 벽화 작업이 활발했었고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한 많은 멕시코 작가들이 미국 내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 예술을 부흥시키는 것이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조지 비들은 피폐해진 대중들의 삶에 예술이 진정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예술지원사업에 대한 지자체나 시민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사업을 어려운 시국에 꼭 해야만 하냐는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작가들의 선발과정에서도 인종과 유명세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선발기준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지역위원회는 유명세 있는 작가를 선호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명세를 타지 못했던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참여의 기회가 적었다. 또한 일부 정치인들은 이 사업이 대부분 생활밀착형 공공예술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을 들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업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시행과정에서 정부가 정치적 발언을 금지시키는 등의 검열을 행했으며, 미술의 표현양식을 통제하기도 했다.

이제 예술가들도 노동자와 비슷한 일과를 보내게 되었다. 중앙정부나 지역사회가 내준 과제를 하루종일 해내며 고단한 시간을 보낸 후 급료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곤 했으며, 줄을 서며 잡담을 나누거나 작품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들 중에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과 같이 후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들도 있다. 이들은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을 인정해 주지 않는 무분별한 정책, 예술 표현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간섭으로 고충을 겪었지만, 1968년 잭슨 폴록의 수제자 오코너 교수가 이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했던 여론조사에 의하면 참가자의 88%가 이때를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시기였다고 응답했다고 한다(‘20세기 전기 미국미술의 성장과 후원’·강인혜 외 3인).

루즈벨트와 일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가치와 결단으로 이루어진 이 사업은 공황기가 지나자 의회에 의해 재정확대 정책이 철회되면서 함께 마무리 되었다. 이 사업은 대중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사실주의적이고 실용적인 표현을 표방했고, 이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은 미국 특유의 사실주의 회화양식을 성립시켰으며, 후에 대중에게 친화력을 발휘하는 장르와 팝아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사실주의적인 양식은 오늘날 미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손꼽히는 미국의 현대추상표현주의 작가들 중 상당수가 이 사업에 참여했는데도 말이다. 일부 작가들한테는 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대한 반발심이 오히려 새로운 양식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었는데, 새로 구축한 이들의 양식은 자유롭고 즉흥적인 표현을 선호했다.

사업이 종료되고 얼마 안 있어 이들 작가들은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작품 가격은 치솟았다. 더불어 미국정부는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쏟은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된다.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일부 지자체는 그 덕을 보지 못하고 작품을 처분해버려 시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이 사업이 당시 작가들에게 갖는 가장 큰 의의는 예술하는 행위가 노동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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