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헌법을 강의하던 사람으로, 학생들에게 1970년대와 80년대의 파행적인 의회정치는 민주화투쟁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설명했고, 90년대 초, 민주화정권인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여야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문민정부를 거쳐 여야에 의한 정권교체까지 이루어진 오늘의 파행은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진위(眞僞)와 관계없이 선전 선동의 수단을 동원하여 막말정치, 패거리정치로 일관하는 오늘의 정치행태는 국민들의 일상적인 생활태도는 물론, 초등학교에서 대학 학생회장선거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오염시키고 말았다. 시민생활권에서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주민 스스로가 설득과 공감, 타협과 협조를 통하여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양보하면 지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집단주의, 이기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민주정치에서의 정당은 ‘실천 가능한 정책’을 가져야 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책임 있는 반대’를 생산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당정치는 ‘적절한 반대’와 ‘적절한 타협’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반대와 투쟁은 언제나 타협을 전제로 하는 것이 정도(政道)로 되어있다. 서구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야당을 반대당이라고도 한다. 정당에 의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민주정치의 기본으로 삼는 것도, 각 정당이 여야의 경험을 통해 역지사지할 수 있기 때문인데, 우리정치는 여야의 교체를 오히려 보복의 악순환으로 삼고 있다. 테러방지법이나 경제 활성화 법안 등은 여야가 합리적 토론을 통해 남용에 대한 소지를 지적·시정하기 위한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완전봉쇄를 위한 반대의 대상은 아니지 않는가! 정당정치가 공격과 방어에만 치중하는 한, 토론과 타협의 민주정치는 불가능하다. 정당이 정책을 통해서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고, 상대당의 약점을 부각시켜 관심을 끄는데 만 몰두하면, 헌법을 제아무리 개정한들 무슨 소용 있겠나? 정치는 국민들에게 밝은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기대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 국민에게 기대와 희망을 줄 수 없는 정치라면 매년 수백억 원씩의 정당보조금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에 근접했다고 하지만, 서민들의 빠듯한 생활고에서 새어나오는 탄식이나, 중·소상공인들의 낙담에 조금만 귀 기울여도 정치가 얼마나 잘못 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와중에 ‘국회선진화법’은 왜 만들어 민주주의의 틀을 흔들고 있는가? 선거에서의 다수결원칙은 대의민주국가구성을 위한 기초적 원칙이다. 헌법에 규정이 있든 없든 의회에서의 표결도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보편화 했고, 의결정족수에 가중을 요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헌법이 직접 명문화했을 때에만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다수결원리를 선거에서부터 실시하여 국민주권의 원리를 충실히 보장하기 위한 제도다. 그러나 국회는 법률도 아닌 ‘국회규칙’에 국회선진화법이라는 미명을 붙여 법안심의과정에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이라는 위헌적인 규정을 만들어, 국민의 대표기관이라는 국회의 의사가 표결과정에조차 진입할 수 없도록 소수의사로 묶어 놨다. 명백한 위헌이며 민주정치의 파괴다. 대의민주정치에서는 주권자인 국민이 선거라는 주권행사를 통하여 다수당을 선출하고, 그 다수당은 국민의 이름으로 주권을 대행하는 것이다. 국회상임위원회도 주권자가 위임해 준 바에 따라 구성하는 것이 원칙인데, 여야가 담합해서 균등하게 구성하는 것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부정하는 명백한 반민주적인 행태다. 국회는 무슨 권리로 국민이 만들어 준 다수의 권리를 소수당에 나눠주고 담합정치를 하고 있나? 민주국가의 대의기관은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는 기능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고, 대의기관의 의사결정방법은 합리적인 토론과 협상, 그리고 다수결원칙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국회가 일탈하면 국가기관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가치타락에 빠져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