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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모든 형태가 사라져 버린 극단적인 평면 회화

 

고대 그리스의 화가였던 제욱시스와 파라우시스의 대결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두 사람은 누가 더 진짜처럼 그리느냐를 두고 겨루었는데, 제욱시스는 포도나무를 그렸다. 그림이 어찌나 진짜 같던지 새가 그림을 향해 달려들었고, 제욱시스는 의기양양해 파라우시스에게 커튼을 열어 그의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러자 파라우시스는 그 커튼이 실제 커튼이 아니라 그의 그림이라고 말한다.

제욱시스와 파라우시스의 대결은 한 때 미술사에서 작품이 실제와 얼마나 똑같은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매겨졌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대상을 알아볼 수 없는 기괴한 형태가 넘쳐나고, 심지어 그 어떤 형태도 아예 드러나지 않는 회화가 판치는 오늘날, 이들의 대결은 무색하게만 느껴진다. 서구의 미술사를 단 몇 마디로 분절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들은 캔버스에서 ‘형태’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혹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화두 중 하나를 꼽아보면, 캔버스에 형태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해악하다고 여겼던 비평가들과 예술가들의 주장을 들 수 있는데, 이들 비평가와 예술가를 필두로 1940년대 말부터 형성된 미국의 현대 예술경향은 한때 세계를 풍미했고, 사실 지금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 시간에 미국 연방 정부의 대대적인 공공미술 사업과 여기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만났다. 공공미술 사업은 ‘대중들과의 소통’이라는 가치를 매우 중하게 여겼고 예술가들로 하여금 ‘미국적 사실주의’를 표방하도록 강요했다. 정부의 잦은 간섭에 피로해질 대로 피로해진 일부 예술가들은 1943년 사업이 철수되자마자 이 억압적인 형식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국가’라는 것 자체가 예술에 해악한 것이었는데,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미국 정부의 간섭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이라는 미술 형식을 채택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체적인 모순, 사회주의 국가들이 지식인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전체주의화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얻은 실망감도 크게 작용했다.

정부의 대대적인 사업과 지원이 종료되자 뉴욕에 머물고 있었던 예술가들은 고립된 그들만의 공동체에 머물러 생활했다. 그들은 작품 활동을 계속했지만 더 이상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받고자 굳이 노력하지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를 위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그들 작품의 관객은 그들 자신이었고, 뜻을 함께하는 일부 동료의 지지만으로도 작품 스타일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작품의 의미를 외부 현상이 아닌 자기 내부에서 찾았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내면에 천착했고 회화의 본질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 어떤 이들은 동양의 ‘선’사상이나 수련·명상을 지향하는 이국의 종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때 채택된 대표적인 미술 형식은 캔버스에서 형태를 없애고 극단적으로 평면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양식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예술가는 피카소였는데, 미국의 현대 추상화가들은 입체주의 작품들로부터 평면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시각적인 예술인 회화에서 시각적인 이미지가 아닌 다른 요소들을 배재하는 것이 회화의 본질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림에서 문학적인 요소, 모든 환영의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종종 신화의 주인공으로 일컬어지는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과 그의 형식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서구 모더니즘 회화의 절정에 위치한 이들이다. 잭슨폴록은 캔버스를 아예 바닥에 뉘어놓고 그 위에 물감을 뿌리거나 흐르게 함으로써 작품을 완성했다. 작품에는 패기가 넘쳤고 형식은 파격적이었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그가 구사한 이 방식은 당시 제도권 내에 있었던 미술계 인사들의 눈에 충분히 들어올 정도로 인상적이었는데, 그의 작품이 자유로운 표현과 사고를 표상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묘하게도 우방 세계의 정치적 모토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 새로운 양식을 구사하는 예술가 집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예술계 인사들과 후원자들의 동의를 성공적으로 얻어냈고, 그 자신도 미국 모더니즘 미술 이론의 선구자로 우뚝 서게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이때 그가 고안해낸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곧이어 대두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의 가장 큰 표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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