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宙合樓)의 정문(正門)인 어수문(魚水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문(門)의 이름은 본 건물의 명칭을 따서 사용하는데, 어수문은 주합루와 다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동궐도’를 보면 주합루 뒤편에 ‘어수당(魚水堂)’이라고 쓴 건물이 보이는데, 같은 이름의 어수당과 어수문이 서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수당은 지금 존재하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어수당은 불로문(不老門)안에 있는데 효종 시기에 창건되었다.”라고 되어 있어 정조가 만든 주합루보다 이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궁궐지’에서는 효종, 숙종, 정조, 순조가 어수당을 주제로 한 시(詩)가 실려 있으며 숙종의 시(詩)에는 어수당을 화당(華堂)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며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같은 이름의 건물과 문(門)이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를 이끌고 있다. 만약 두 건물이 하나의 구성이었다고 가정한다면, 둘 중 하나는 본 위치가 아닐 수 있다. 가정이 맞는다면 어수문의 이전보다는 어수당이 주합루의 창건으로 이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자료 없이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현재 어수당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동궐도’의 그림만 가지고 어수문과 비교를 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어수문과 주합루를 비교하여 두 건물의 관계를 끌어내 보자.
건물의 창건 시기
주합루의 창건 이유와 착공일과 준공일이 여러 기록물에 잘 남아있지만, 어수문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다. 몇 안 되는 어수문의 기록 중 처음 나오는 것은 〈승정원일기〉 ‘정조 즉위년(1776) 5월 4일’인데, 주합루는 정조 즉위년 9월에 준공되었으므로 어수문은 주합루의 준공 이전부터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어수문의 창건 시기가 주합루의 공사착공 이전인지 아니면 같이 시작했지만, 주합루보다 규모가 작아 일찍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공사 측면에서 보면, 같은 공정은 가능한 한 시기에 모아서 하는 것이 경제·합리적임으로 어수문만 특별히 먼저 공사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층 주합루의 공사 기간이 길어짐으로 어수문을 먼저 준공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먼저 준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사 순서를 보면 진입로의 뒤쪽부터 앞쪽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대문과 담장은 마지막에 공사하여야만 한다.
공사 순서에서 보면 주합루의 준공 이전에 존재한 어수문은 주합루의 착공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건축양식
건축양식 측면에서 보면, 본 건물과 문(門)은 하나의 구성체로서 이름과 형태 및 양식은 서로 같은 것이 일반적이다. 즉, 근정전과 근정문, 인정전과 인정문, 명정전과 명정문 그리고 종묘의 정전과 남신문을 보면, 문(門)은 본 건물의 명칭을 따르고 있고, 건축양식도 본 건물과 같았다.
그러나 어수문은 다포양식이고 주합루는 주심포계인 이익공으로 서로 다른 양식을 하고 있다. 공포형식에서는 주심포보다는 다포형식을 높은 위계로 보기에, 어수문이 본 건물인 주합루보다 위계가 높게 되어 합리적인 조합으로 보이지 않는다.
주합루가 어제각(御製閣)이라면 어수문은 사묘건축(祠廟建築)의 정문(正門)으로 삼문(三門)이라 할 수 있다. 사묘건축의 대표인 종묘의 정전을 보아도 화려한 단청을 배제하고 석간주로만 하여 절제된 엄숙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제각의 정문을 다포양식으로 화려하게 표현한 것은 유교의 정신인 검소(儉素)와는 거리가 있다.
그동안 두 건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 기회로 창건 시기와 건축양식에 대해 살펴본 결과, 이름과 양식 및 창건 시기 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하여 재미있는 주제였고, 다음 편에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