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후원 주합루의 서쪽에는 이름이 아름다운 건물이 있는데 ‘책의 향기’의 뜻을 가진 서향각(書香閣)이 그 주인공이다. 이 건물은 동향하고 있으며 주합루의 부속건물이며 정조가 이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할 때 같이 세워졌다.
‘정조실록’에서 규장각의 준공 당시(1776년 9월) 기록하기를 ‘어제각(御製閣)으로 지은 건물을 규장각과 주합루라 하고 서남쪽에는 봉모당(奉謨堂)은 열성조의 어제·어필·어화(御?)·고명(顧命)·유고(遺誥)·밀교(密敎)와 선보(璿譜)·세보(世譜)·보감(寶鑑)·장지(狀誌)를 봉안하였다. 정남(正南)에는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는 2층으로 중국 도서와 문적을 간직하였고, 서북쪽에는 서고(西庫)인데 우리나라 도서와 문적을 간직하였다. 규장각(주합루)의 정서(正西)에는 이안각(移安閣)인데 어진·어제·어필을 이봉(移奉)하여 포쇄(曝?)하는 곳으로 삼았다.’라고 적고 있어 이안각이 지금의 서향각이 되겠다.
포쇄(曝?)란 종이류에 거풍(擧風:바람을 쐬는 것)시켜서 습기를 제거하여 부식 및 충해를 방지시킴으로써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왕실 도서의 포쇄는 국가적 행사로 치러졌으며 포쇄일은 청명한 길일 택하여 관료의 지휘 하에 실시하였으며 포쇄절차는 국왕을 대하듯이 진행할 정도로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서향각’ 편에서, 포쇄는 사계절의 첫 번째 달(四孟朔, 1·4·7·10월) 보름에 한다고 되어 있으나, 날씨에 따라 일정이 변경되기도 했을 것이며 보통은 장마가 끝난 8·9월이 가장 많이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향각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며 단열을 위하여 2중 공간으로 되어있다. 중앙 2칸은 마루이고, 그 옆 2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퇴칸은 온돌이 설치되지 않은 마루로 궁궐의 침실 형식과 같았다. 그런데 이런 평면에서는 포쇄를 실행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포쇄란 바람과 햇볕을 쐬는 것으로 2중 공간으로 된 내부에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쇄는 건물외부에서 하고 저녁이나 비가 올 경우 대상물을 내부로 옮겨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 즉위년(1776) 10월에 작성된 일성록을 보면 정조가 이곳에서 약방(藥房)의 진료를 받은 것이 나와 있으며, 다음해도 여러 번 서향각에 와서 정조의 오른팔인 홍국영(1748~1781)과 대화 한 내용이 나온다.
규장각의 2층은 어진을 모신 곳이고 1층은 각신들이 공부하고 있어, 정조가 같이 있는 것이 서로 불편하기에 주합루에서 조금 떨어진 서향각에 머물면서 가까운 각신들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또 정조 실록에서 정조 15년(1791)에는 이곳을 어진을 그리는 장소로 사용하라고 명령하여, 82세의 윤동섬(1710~1795)이 어진을 그리게 된다. 그는 10년 전인 72세 때에도 정조의 어진을 그린 적이 있는데, 정조의 마음에 들었는지 노령의 윤동섬에게 기회를 다시 주게 되고 그 결과에 만족하는 모습이 보인 기록이 나온다.
서향각은 포쇄 시기뿐 아니라, 제사건축인 선원전 및 주합루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어진을 이곳으로 옮겨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어제각의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정조는 이곳을 편전처럼 편하게 신하를 만나는 장소도 사용하였다.
정조 18년(1794)에는 주합루를 보수할 때 어진을 서향각에 옮겨 봉안하였고, 순조 3년(1803) 인정전에 화재가 발생할 때 선원전의 어진을 이곳에서 잠깐 봉안하기도 하였다.
서향각은 규장각의 부속시설로 많은 서고 중 하나로 건립되었으며 규장각과 서고들의 사이 중앙부에 자리하였고 포쇄가 주요 용도였다.
‘책의 향기’가 나는 곳이란 뜻으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선원전 화재 이후 이곳은 포쇄의 장소보다는 선왕과 관련된 문서들을 보관하는 어제각의 역할을 하게 되고 후대 국왕들은 이곳에서 봉심(奉審, 보살피던 일)하게 된다.
하지만 정미 조약(1907) 이후 일본인 관리가 주도한 ‘개정 제사제도칙령(1908)’에 의해 왕실의 제사(祭祀)가 축소되면서, 서향각에서 행하던 어제각의 용도도 사라진다. 1911년 서향각의 용도가 양잠소(養蠶所, 누에를 사육(飼育)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것을 관리하던 곳)로 변하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