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님께서 지난 1월 15일 오후 9시 35분경 자택에서 별세하시어 성공회대학교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사흘 동안 무려 8천500여 시민들의 조문이 이어졌고 틈틈이 많은 야당 정치인들의 조문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영전 앞에서 흐느끼는 이들은 대체로 20~30대 젊은이들이 많았다. 신 선생님의 세간에서의 지성적 영향력은 가히 종교적인 경지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것은 여당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조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이 정치인이 아닌 자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신 선생님을 향한 조문은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정치인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2016년 1월 18일 월요일의 벽제는 정말 추웠다. 그곳까지 동행해준 정치인은 지역에서 긴 세월 함께 해오고 있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야권 정치인들 중에는 눈도장 얼굴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어서 부득이 조문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상주가 되어 관 뒤편에 유족과 함께 서서 영구차로 이동하는 10 여분 동안 유명한 정치인 한 분이 함께 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따라붙자 유족까지 밀쳐내며 그 정치인 옆에 서서 걷는 이름 모를 몇몇 사람들의 작태는 볼썽 사나왔다. 고인의 죽음까지 자신의 욕망에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뻔뻔하게 이용할 것이다. 정작 고인을 애도해야 하는 자리에 정치인 이름이 박힌 많은 조기들이 영결식 입구를 장식하고 잠시 음식을 제공하는 공간이 이들의 친교와 서로 동지임을 확인하는 터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지는 않다. 정치인이 아닌 사람이 별세한 경우에는 현직 정치인들의 조문과 머무는 시간은 10분 이내로 하고 조화와 조기, 부의금을 받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을 누가 만들 것이며 만든다고 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또 별세하시고 나니 이 분에 대한 악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또한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마는 대표적인 악풀 중에서 국내 한 저명인사가 직접 모욕하는 글을 올린 것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같은 국민임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인간은 모두 허물이 있다. 그 허물의 정도문제이겠지만 소위 지식인으로서 어떤 사명감을 갖고 그런 글을 올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분명 지성인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차라리 살아생전에 직접 도전을 할 것이지 돌아가신 직후에 하는 행위는 비겁하다 못해 비열한 것이다. 그 분의 정치적인 사상과 성향이 무엇인지를 떠나 민주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고 존경했다. 감상적인 회고가 아니라 필자는 신 선생님을 1988년 출소 후 몇날 지나지 않아 뵌 후 유학기간 빼고 15년 이상을 학교 공간에서 함께 지냈다. 그 세월 중에 어떤 때는 선생님께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실망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 분의 큰 존재 아래에서 그런 실망은 먼지 같이 사사로운 용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했다.
위대한 사람이든 한 평생 이름도 없이 홀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든 모두 각자의 인생여정이 있기 마련이다. 성인(saint)들도 한 평생을 살면서 한 점의 오점이 없이 살았던 분은 없다. 그러나 긴 인생에서 사사로운 것들은 인품과 업적에 묻히고 결국 이미지만 남아 후손들에게 각인되는 것이다. 지금 각자 죽는다면 자신은 친지 후배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인식될 것인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범주만큼이나 넓고 또 이것을 촘촘하게 세분할 수 있을 것이다. 크게는 훌륭했던 분, 점잖았던 분, 인정이 많았던 분, 나쁜 놈, 사기꾼,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왔던 놈, 자기 밖에 모르던 놈, 등등. 이제 남은 짧은 인생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신 선생님은 자신에게 해를 준 사람일지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감정 없이 불렀던 가사가 기억난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라! 이 나이에 이제야 이 가사가 몸으로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