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이다. 각 정당들은 자신에 대한 지지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영입 경쟁에 분주하다. 그런데 이번 총선을 앞두고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이 여와 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변신의 모습들이다. 물론 그동안에도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 경계를 넘어서는 영입은 우리 정치에서 종종 있어왔다.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이재오·손학규·김문수 등의 진보성향 인사들이 신한국당에 영입되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이종찬, 김중권 등 5·6공 인사들이 중용되었다. 2012년 대선 때에는 한화갑, 김경재 등 일부 동교동계 인사들이 새누리당에 영입되기도 했다. 우리 정치가 보수-진보, 여-야의 진영대결 논리에만 갇혀있었음을 돌아본다면 이같은 현상은 긍정적인 면도 갖고 있다. 우리 정치에서 진영 간의 과도한 경계는 무너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여야를 넘나드는 장면들이 대단히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다. 야당에서 ‘친노 패권주의’ 저격의 선봉에 섰던 조경태 의원은 돌연 새누리당행을 택했다. 일각에서는 결국 여당 가려고 그랬던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국보위 출신의 경력에 박근혜 대통령 탄생의 공신이었던 김종인 전 의원은 제1야당을 이끄는 비대위원장이 되었다. 이상돈 교수 영입 시도 때는 난리가 났던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이번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국민의당도 창당준비위원장을 지냈던 윤여준 전 장관부터 여권 출신이었고, 새누리당 출신 인사들에 대한 영입 시도가 계속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의당은 합리적 보수층까지 함께 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이니 과거 불문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분위기이다.
이런 얘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는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살자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너도 나도 모든 것을 덮고 선거에서의 효과만 생각하는 대열에 동참할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정치에서 여야의 구분이 정치적 신념에서 상극을 이루어왔던 현실을 돌아보면, 여야 사이를 넘나들 때는 그래도 책임있는 소명 정도는 따라야 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자신들의 행보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조차 없이 이루어지는 변신이, 선거에서 유리하다고 대접만 받는다면 우리의 역사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닐까.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서 불안을 겪는다. ‘과연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일까, 내가 하는 선택은 맞는 것일까’ 하는 망설임이다. 그리고 선택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선택의 책임에 대한 불안이 따른다. 나는 과연 옳은 선택을 했던 것일까에 대한 불안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지난 과정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가족이 모였을 때 먹으려고 어머니가 맡기고 나간 과자를 혼자 먹어버린 아이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선택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기에 성찰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이 보여주는 과거를 묻지마세요식의 영입에서 책임과 성찰의 메시지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단 고개 숙이면서 시작해야 할 사람들이 거꾸로 화려한 조명을 받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지켜온 가치의 전도 현상을 접하게 된다. 역사가 어려웠을 그 때 어디에 서 있었던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면, 누가 그런 때 구태여 어려운 삶을 살려고 하겠는가. 정당들끼리는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그런 질문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 앞의 정파적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리고 그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너무 비루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혼돈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