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목화를 국내에 들여왔던 문익점 선생의 붓통에는 목화씨가 과연 몇 개 있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겁니다”
전국 각지에서 토종씨앗을 나눔하고자 혹은 나눔을 받고자 모여든 농부들은 명사의 강의와 선배 농부의 강의에 집중을 하면서도 마음만은 바쁘다. 그리고 봄바람만큼이나 신이 난 농부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다른 농부들을 배려하면서 씨앗을 나눔해 가시라’고. 봄농사를 시작하기 직전 모여서 나눔하는 농부들의 손에 토종씨앗들이 들린 채 희망을 안고 떠난다. 이번에는 어느 밭으로 가게될지 궁금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땅, 우리 기후에 적응하고 대대로 이 땅에 자손을 퍼뜨려 온 토종씨앗들이 우리의 입맛과 몸에 가장 잘 맞는 음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광명씨앗도서관이 토종씨앗 나눔을 통해 전국 방방곳곳의 농부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우리의 토종씨앗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아픈 현실 속에서 소중한 우리 것을 지켜내려는 작은 움직임이다. 당연히 우리 것인줄로만 알고 있던 청양고추가 많은 돈(로얄티)을 주고 씨앗을 사서 심는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씨앗 한 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때다. 우리 미래의 자산이며, 우리의 문화가 만들어지는 근본이 바로 그 씨앗 한 알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나눔받은 농부들은 잘 키워서 정성껏 채종 후 다시 나눔하러 오시고, 새로이 오신 농부들은 처음 접하는 토종씨앗을 나눔받아 기쁜마음으로 심고 가꾸어 내년 이맘 때 또 나눔하러 광명씨앗도서관에 모일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씨앗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배가 불러온다.
주저리주저리 달리는 ‘준열이콩’, 너무 맛있어서 게걸스럽게 먹었다는 ‘게걸무’, 제주의 구억리에서 수집한 구억배추 갓끈처럼 길쭉해서 ‘갓끈동부’, 쥐이빨과 흡사한 ‘쥐이빨옥수수’, 담배잎처럼 널찍하고 억세게 생긴 그러나 너무 맛있는 ‘담배상추’, 모양과 질감이 배추와 흡사한 ‘배추상추’ 등등 무수히 많은 사연을 가진 우리의 토종씨앗들이다. 할머니·할아버지 농부들의 사연도 그만큼 담고 있다.
다양한 이름을 가진 소중한 우리의 토종씨앗이 지역 곳곳의 작은 텃밭에서 당당하게 자태를 뽐내고 이름값을 하리라 믿으며 자식 떠나보내듯 농부들 손에 들려 보낸다. 나눔하고 나눔받는 농부들 모두의 마음이다.
우리는 매년 ‘토종씨앗수집단’이라는 이름을 걸고 3~4개월 가량 일주일에 3일씩 지방 농가들을 뒤진다. 현재 농사를 짓고 있는 많은 농부들 중 토종씨앗으로 종자를 삼는 농부들은 흔하지 않다. 대개 젊은 농부들은 어떤 작물이 환금성(換金性)이 제일 높을까부터 고민하고 선택한다. 그들은 매년 새로이 맞이하는 봄농사 준비의 첫 번째로 종자를 산다. 병충해가 강하고, 관리가 쉽고, 수확이 많은 종자. ‘f1’이라고 하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씨앗들이다. 그 씨앗들의 경우 작물에서 씨앗을 받아 내년에 다시 심으면 같은 것이 나오지 않는다. 금보다 비싼 고추씨를 해마다 돈을 주고 사서 심는다.
우리나라 농가 수가 점점 줄어들고, 농업인이 자꾸 없어지고, 농부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건 많은 돈을 들여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정작 손에 들어오는 이익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가의 젊은 농부들은 말 그대로 환금성 작물을 찾는다. 특용작물, 돈이 되는 작물, 우리가 먹고 싶은 또는 먹어야만 하는 작물이 줄어들고 있다.
토종씨앗을 수집하러 다니다보면 하우스 안쪽에 깊숙이 들어앉아 혼자서 뭔가를 하시는 할머니들이 계시는데, 그곳에 반드시 토종씨앗이 있다. 그리고 그 할머니들의 모습 속에는 우리가 그토록 찾고 있던 토종씨앗보다 더 깊은 삶의 철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시어머니가 남겨주신 씨앗’이라든지, ‘시집올 때 친정엄마가 챙겨주신 씨앗’, ‘그냥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심던 것’이라는 등등 어느 대하소설 못잖은 귀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씨앗들이다.
그런 사연이 담긴 소중한 토종씨앗들 중 제일 좋은 놈으로 골라 웃는 모습으로, 그리고 버석거리는 손으로 건네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손을 그래서 우린 한동안 놓지를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