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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열고관(閱古觀)과 개유와(皆有窩) - 中

 

지금은 없어졌지만, 정조에 의해 건설된 열고관(閱古館), 개유와라는 서고(書庫)가 있었다. 이 서고의 평면은 ‘丁’자형으로 머리 부분의 열고관은 2층이고 개유와는 본체로 1층이다. 위치는 규장각의 맞은편 언덕 위로 부용정의 뒤쪽이 된다. 하나의 건물에 2개 이름이 있지만, 당시에 증축, 용도 등에 따라 이름을 붙이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건물에 대한 자료 중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은 김홍도의 ‘규장각도’와 ‘동궐도’ 및 ‘동궐도형’과 1928년에 만든 ‘유리건판 필름’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앞서는 ‘규장각도’에는 1층의 개유와 건물만 보이고 열고관은 보이지 않고 있어, 정조가 규장각을 처음 건축할 당시 열고관은 계획에 포함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순조시기에 만들어진 ‘동궐도’에서는 열고관과 개유와 건물이 잘 표현되어 있으나 이름이 반대로 적고 있는 것이 확인되며, 위치도 부용정의 서쪽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어 정조의 창건 의지를 파악되지 않은 채 화공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표현된 결과로 보인다.

‘동궐도형’은 근대기술로 측정하여 위치에 대한 것은 정확하다고 보며, 또 근대 자료 중 유리건판의 사진 자료를 비교해 보면 두 자료는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정조가 처음 이곳에 영조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영조의 유품을 보관하는 어제각과 도서관을 이곳에 설립하고자 하여 추진하고 정조는 단원 김홍도에게 공사의 종합계획도를 그려오게 하는데 이것이 ‘규장각도’이다. 여기에는 주합루와 서향각 및 부용지, 부용정은 보이지만 서고(書庫)의 여러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주합루 어제각 단지는 정조의 즉위년(1776) 3월부터 시작하지만, 중간에 계획에 없던 열고관(중국서적 보관), 서고(西庫, 조선서적 보관), 수직간(守直間,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 등 책에 관한 여러 건물과 같은 해 9월에 준공된다.

그러면 정조는 공사 중간에 계획을 왜 수정하게 되었을까, 아마 중국에서 엄청난 백과사전을 만들었으며 또한 그 책을 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정조의 마음은 이미 책을 구해 읽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가져와 어디에 보관하고 책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로 정해야 하나 등 여러 고민에도 빠졌을 것이다. 귀중한 서적이므로 지위고하와 관계없이 정조가 선별한 사람만 접근할 수 있고 정조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을 고려하여 궁궐의 후원인 이곳을 선정한 것 같다.

정조 즉위년(1776) 9월 24일 청나라에 조선왕의 등극을 알리러 가는 진하 겸 사은사로 서호수(徐浩修, 1736~1799년)를 부사로 선정하고 책을 구하도록 특명을 내리고 서호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책을 구해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청나라로 떠나게 된다.

사은사 일행이 떠난 다음날 규장각 조직을 편성하는데, 구하지도 않은 중국의 백과사전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연구하는 규장각 조직(친위부대)의 설립은 정조가 얼마나 이 책들을 기대하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의 기록을 보면 정조실록(즉위년 1776년 9월 25일)에 나와 있는데 이곳에 “열고관은 상하 2층이고 북쪽으로 꺾어 개유와를 만들었는데 중국본 도서와 문적을 보관하고, 서향각의 서쪽에는 서고(西庫)인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책을 보관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청나라에 갔던 서호수가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아직 일반화되지 못해 구하지 못하고 대신 70년 전에 만든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다음 해인 1777년 3월에 구해서 돌아오자 그들을 치하하고 벼슬을 높여주었다. 만약 이 책을 구하지 못했다면 정조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규장각각신이 아니면 벼슬이 높아도 책을 볼 수 없어 범위의 한계가 있었는데 만약 복사해서 지역별로 배분하여 많은 사람이 보았다면 아픈 근대기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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