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진작가가 빛바랜 사진을 보면 과거가 기억나고, 그 기억이 그 과거를 사랑하게 한다고 했다. 노래도 그렇다. 어릴 적 듣고 즐기던 노래가 불현 듯 떠올라 흥얼대기도 하지만 특히 거리에서 흘러간 노래가 들려올 때는 잠시 과거로 회귀되곤 한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때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우리는 그 어렵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혁명공약을 외워야만 했다.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시급히 강화 한다”. 그리고 이런 가사말의 노래로 조회를 마쳤다. “5·16의 새벽나팔 행진의 소리 우리들은 걸어간다 발을 맞추어….” 그리고 교정에는 “명랑한 새 아침에 태양도 밝다. 당신은 들로 가고 나는 공장에…. 재건, 재건 만나면 인사….”라는 노래가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을 덮었다. 그리고 귀가하면 봄, 가을에 곡식을 지불하고 마루에 매달았던 누렇고 작은 스피커에서 “팔 걷고 땀 흘리는 보람찬 나날, 꽃 되어 빛날 날이 앞에 보인다….”가 흘러나왔는데 이것은 ‘국토 건설대’ 노래였다. 지금 살펴보니 2절 가사만 기억하고 있다.
그 바로 2년 전 4·19 학생의거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우리는 “여든 평생 한 결 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대동령 우리대통령….” 이승만 찬가를 부르며 놀았던 터였다. 다음 노래가사는 언제 배웠는지 희미하지만 어린 나이였음에도 곡도 가사도 아름다웠다고 기억되는데 보건체조 노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름다워라 이른 아침 무궁화에 향기를 품고 맑은 공기는 샘물처럼 달려가자 모두 나서라, 건강한 몸을 자랑하며….”
그리고 1968년 12월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고, 바로 직후에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가 동네를 울렸다. 어릴 적 듣고 배우고 불렀던 노래들이라 잊혀지지 않고 회갑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무의식중에 종종 이런 노래가 입가에서 맴돌며 가사가 점점 또렷해지는 것이 이상하다. 치매환자는 오래된 과거만 잘 기억한다는데 혹시 이런 초기증상이 아닌가 걱정도 해 보았다.
1975년 여름, 군에 가서는 “하늘을 달리는 우리 꿈을 보아라, 하늘을 지키는 우리 힘을 믿어라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공군가를 불렀다. 제대 전후에 향토예비군가가 있었는데 가사를 완전히 바꾸어 불러 진짜 가사와 헛갈리기도 했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가 “발로차고 헤딩 놓고 엎어치기 놔….”로 시니컬하게 개사되어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그 어떤 어린이 청소년들도 군대생활을 빼고는 이와 같은 노래나 공약을 부르거나 외우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백설희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는 ‘봄날은 간다’가 흐르는데, 그 노랫말과 가락이 어쩌면 그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새삼 새로웠다.
필자 상상에는 20대 후반, 혹 30대 초반의 여인이 봄날에 긴 강둑에 털 푸덕 앉아 조금은 흐트러진 연분홍 한복 치마를 무릎까지 올리고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얼마 전에 있었던 배신의 회한을 회상하는 듯하다. 가슴 저 밑에서부터 순간순간 저려오는 회한의 슬픔은 봄바람에 씻겨 나애심의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흘러 서럽고 외로웠던 세월은 흘러….”라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노래와 느낌이 퍽 유사하다. 요즘 노래와 비교한다면 이보다 끈적거리는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와 견줄만 하다. ‘봄날은 간다’와 ‘과거를 묻지 마세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각각 1954년, 1958년, 1993년에 탄생한 노래들이다. 한국동란 직후에 생산된 노래들은 대체로 한국적인 회한과 이국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연인과의 이별 외에는 과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겪었던 전쟁과 기아, 식민지, 군사독재의 고통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곡도 가사도 ‘과거의 봄날’ 같지 않다. 선친의 봄이 회한이었다면 그래도 우리들의 봄은 딸기밭이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의 봄날은 뿌연 미세먼지로 인해 철을 알 수 없는 봄 같아 보인다. 연분홍 치마는 더 이상 봄바람에 휘날리지는 않지만, 더 이상 과거를 묻지 말고 다시 올 상큼한 봄바람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