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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반 고흐의 구두에 관한 엇갈린 해석들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하여 반 고흐의 구두를 살펴보던 중 시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소식들을 접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분노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금까지 보고 들으며 가져왔던 믿음과 그 이면의 실체가 달라서일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보는 행위 속에는 여러 층위의 이면들이 도사리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 반 고흐의 구두 한 켤레가 있다. 미술사에서 수많은 이들에 의해 회고되어 오던 바로 그 구두이다. 거친 황토 빛 배경에 가죽이 헤지고 끈도 느슨해진 구두 한 켤레가 거친 붓 터치로 그려져 있다.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구두를 일컬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구두의 어두운 구멍에는 들일을 하러 나선이의 고통이 도사리고 있고, 구두의 실팍한 무게에는 거친 바람 속에서 밭고랑을 걸으며 쌓인 강인함이 실려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어 있다.’ 그의 시각에서 반 고흐의 구두는 농민의 성스러운 노동과 대지의 신비에 대한 표상이었다.

하이데거는 시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했던 철학자였으며 시적인 울림을 주는 미술작품을 높게 평가했다. 하이데거의 의하면 작품은 그 표면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 울림으로 전달될 수 있어야 하며 그로 말미암아 작품은 진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 집에 박혀 생활하며 신문과 TV를 멀리 한 채 철학과 글쓰기에 매진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재임 시절 파시즘에 부역했던 이력을 지니고 있다. 훗날 자신의 정치적 과오를 인정하긴 했지만 신비에 가까운 그의 철학적 견해와 신념은 파시즘과 일면 맥을 같이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는 학자의 꼼꼼한 기질을 발휘해 하이데거의 견해를 조목조목 따진다. 하이데거의 구두 묘사를 보아 이 작품은 고흐의 구두 작품 시리즈 중에서도 1886~1887년 사이 파리에서 그려진 것이며,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따라 신발이 시골 농부 아낙의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구두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샤피로는 구두의 이미지를 농부와 대지의 표상으로 엮은 하이데거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것인가를 반증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하이데거의 해석이 민심을 선동하기 위한 파시즘의 기제로 작동했다는 반감도 서려있었다.

프랑스의 현대예술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두 사람 모두의 의견에 비껴서 엉뚱하고 독특한 견해를 내놓는다. 우선 마이어 샤피로에 대하여는 그의 반박이 매우 폭 좁은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에 대한 글이 반드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술할 필요가 없으며, 작품 역시 반드시 어떠한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매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데리다에게는 구두의 주인이 고흐일 수도 있고 농부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한 켤레가 아니라 같은 쪽의 신발 두 짝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작품의 구두 앞창은 오른쪽 왼쪽 구분이 모호하게 그려져 있었다.)

데리다가 문학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와 공통점을 지닌다. 데리다의 글에는 기발한 은유가 곳곳에 등장하며, 그는 때때로 글쓰기에서 기존의 단어와 형식을 파괴했다. 여러 개의 단어들을 엮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본문에 단어를 썼다 지운 흔적을 그대로 싣기도 했다. 간혹 데리다의 글을 접할 때면 오늘날 글쓰기라는 행위가 더 이상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는지 의아해지곤 한다.

그는 질료, 작품, 작품의 의미, 진리 등 전혀 다른 개념들을 한데 엮어버린 하이데거의 주장에 대하여 신발끈의 철심이 가죽과 캔버스를 동시에 찔러서 꿰매버린 것이라고 비유한다. 그렇다고 하이데거의 주장을 전면 부인한 것은 아니다. 데리다에게는 전면 부인할 수 있는 것도 전면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글에는 구두끈에 관한 또 다른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한다. 구두끈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선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교차하게 한 붓자국들을 연상시키게 하는 것이다. 그는 하이데거의 글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특정한 선들이 교차하는 은밀한 순간, 선들의 행보, 그러한 행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 디테일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미지수로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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