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삯
/이서화
새참 막걸리에 취한 햇살이 논물 위에 길게 눕는다
개구리밥이 파란 융단처럼 깔렸다 논물 속에 있던 해를 목이 긴 황새가 꿀꺽 삼켜버렸다
기울지 않던 산 그림자도 논바닥에 제 모습을 비춰보는 시간 입이 간지러운 개구리들이 운다
계단 논에는 햇살만큼 좋은 일꾼은 없다
촘촘하게 박음질 되는 모내기를 도우며 일당도 없이 하루를 담그면서 지나간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머슴이다아니, 머슴들의 좌장이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그도 쉰다
푹푹 빠지는 논바닥의 내력을 읽던 햇살이 몸져누운 날은 비가 내린다
따끔따끔 쑤시는 삭신마다 스미는 빗방울
- 시집 ‘굴절을 읽다’ / 2016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동화 속 한 페이지가 따듯한 풍경이 되어 펼쳐진다. 막걸리에 취한 햇살과, 해를 꿀꺽 삼킨 황새, 입이 간지러운 개구리, 이런 풍경들 속엔 충직한 일군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햇살 되시겠다. 종일 제 일을 묵묵히 하고도 일당도 없는 햇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머슴이면서 머슴의 좌장인 햇살, 그런 그가 쉴 수 있는 날은 흐릿한 날뿐, 비가 오는 날엔 심한 몸살을 앓기도 하면서. 빨리 논으로 나가 저 푸른 벼들을 자라게 해야 할텐데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도록 힘을 보태야 할텐데 라는 일념으로 훌훌 털고 일어나 맑은 햇살을 흩뿌리며 행복해 한다. 그러고도 그가 받는 삯이란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일일 것이다. 비가 내려 삭신이 쑤시는 그의 안타까운 어깨를 주물러 주고 싶다. 이 경쾌한 시 속에 빠져 나 또 한 충직한 일군으로 한 마리 달팽이이고 싶다. /정운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