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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수원화성의 성역화

 

정조는 1789년에 사도세자 묘를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아버지가 묻힌 이곳이 자신의 새로운 고향이라 생각한다. 고향이 된 수원을 어떻게 하면 좋게 만들 수 없을까 하는 고민를 하게 된다. 새로운 고향 수원을 성역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시행한다. 이 중 성곽을 세우는 건축 등의 물리적 사업과 중국 황실과 연계하는 사회적 사업을 병행한다.

중국과 연관을 맺고자 한 사회적 사업은 다양한 방면에서 펼쳐진다. 지명과 건물 명칭에 중국의 유명한 것을 차용하고 특히 중국 황실의 뿌리와 학문의 지존인 공자와 관련시킨 것도 있다.

화(華), 화산(華山)은 중국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이고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나라의 진산(鎭山)이였고 이후 당나라와 송나라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화산을 중국의 근본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중국을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 하는데 화(華)가 바로 화산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는 갑인년(1794) 정월 14일 수원에 행차하여 “화성축성(華人祝聖, 화산 사람들이 황제을 축하한다는 뜻)에서 수원성을 화성(華城)이라 한다. 그리고 화(花)와 화(華)는 음과 뜻이 모두 같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로써 수원이 화성으로 이름 바꾸어 새로 출발하는 계기가 된다. 화산(花山)을 화산(華山)으로 바꾼 것은 고대 중국황실과 조선왕실의 근원이 같은 이름을 갖게 되어 고향인 수원에 최고의 이름을 선사하게 된다.

풍(豊), 조선왕조는 본이 전주이므로 전주 객사(客舍) 이름을 특별히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했다. 이는 한나라 고조(유방)의 고향이 풍패(豊沛)에서 유래된 것이다. 정조도 이를 참고하여 새로운 왕조(?)의 고향인 수원화성 행궁 정문의 이름을 풍(豊)자를 사용하여 신풍루(新豊樓)라 한다.

낙남헌(洛南軒)은 수원화성 행궁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중국 후한(後漢)의 도읍인 낙양(洛陽)성 남궁(南宮)에서 따온 것이다.

공심돈(空心墩)은 정조가 화성 시설물 중 특별하게 생각한 것인데 이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성곽시설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축성 당시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순조 시기에 만든 화성전도에는 유독 공심돈에 별도의 이름이 보인다. 축성 공사가 끝난 후 1797년 1월 29일 정조가 공심돈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공심돈을 설명하고 자랑하였다. 동북각루가 방화수류정이라는 별칭이 있던 것처럼 이 시기에 별칭이 부여되었다고 본다. 남공심돈은 고소대(姑蘇臺), 서북공심돈은 악양루(岳陽樓), 동북공심돈은 소라각(召羅脚)이라 고 기록되어 있다. 고소대는 중국 오나라의 부차국왕이 고소산에 건축한 대로 이곳에 월나라를 무찌르고 얻은 미녀 1천명을 살게 하였다는 곳이다. 또 악양루는 중국 호남성 지급시에 있는 건물로 강남 4대 명루의 하나다.

공자(孔子)- 고려 원나라 간섭기에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들어온 공소(孔紹, 공자 52대 손)가 귀화하여 정착한다. 후손 중 한 분류가 수원을 근거지로 집성촌을 이루고 조선전기 대사헌을 지낸 공서린(孔瑞麟)이 퇴직 후 이곳에서 정착한다. 이를 알게 된 정조는 공서린에게 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후손들을 등용한다. 1793년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闕里祠)의 건립을 보조금 사업방식으로 진행하여 지원은 국가에서 하였지만, 진행은 공씨 문중에서 하게 된다. 이로써 정조의 새로운 고향인 수원은 공자의 유풍이 있는 도시가 되고 유학적 위상도 높아지게 된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당시 선진국인 중국황실의 고향과 유명한 건물 명칭들을 따오고 공자까지 연관시킨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조선과 정조의 세계관을 느끼게 하는 슬픈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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