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뛰어난 과학자이자 발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이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 위대한 예술가의 탐구본능이 예술가로서의 자아와 본능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준수하고 훤칠한 외모를 지녔던 그는 쾌활하고 사교적이었으며 멋 부리기를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사람들을 멀리하고 마술과 실험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회화 작업에는 잘 집중하지 못해서 안절부절 할 때가 많았으며,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내버려두는 일도 많아졌다. 프로이드는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인생말년에 대해 ‘이전에는 예술가를 돕는 조수에 지나지 않았던 탐구자가 이제는 더 강한 자가 되어 주인을 압도하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과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였다고도 할 수 있기에 프로이드가 과학에 매긴 ‘조수’라는 직책은 지나치게 초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학과 예술이 서로 다른 분야로 정확하게 분리되기 이전이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예술가가 선구적으로 과학의 법칙을 발견하거나 회화 속에서 과학적 법칙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과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어주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근법이다. 원근법을 최초로 발견한 이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였다면, 마사초는 원근법을 효과적으로 작품에 시각화하여 평면 작품을 마치 실제 공간처럼 보이도록 그렸던 예술가였다. 알베르티라는 과학자는 마사초의 회화 작품을 이리저리 연구하며 원근법을 최초로 공식화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회화사에서 매우 큰 전환점이 될 만한 기법을 발견했는데, 멀고 가까움을 선으로서 뿐만 아니라 색의 밝기를 통해서도 표현하는 ‘대기 원근법’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새로운 그림 재료를 만들었고, 색칠을 하는 방식들도 계발했다.
또 다른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역시 훌륭한 해부학자였다. 그는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에서 해부학을 공부하며 수없는 실습을 반복했고, 미술가뿐만 아니라 최고의 해부학자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미켈란젤로에 의해 사람의 인체가 드로잉으로 재해석되고 재현되니, 해부학계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았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미켈란젤로의 인체 표현은 이러한 실습과 발견을 토대로 완성된 것이었다.
한편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는 두말 할 나위 없는 르네상스 예술가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회화 작업에 임하는 태도는 너무나 상반되어서 대중들의 흥미를 끌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작업속도가 원체 느린데다가, 진행 중인 작품 앞에서 몇 달 동안 빈둥거리거나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회화 작업이 아닌 다른 흥밋거리에 빠져들기도 일쑤였다. 반면 장인정신을 지닌 성실한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작업을 진행하면서 장시간의 비틀린 작업 자세와 눈에 안료가 들어가는 불편함으로 몸이 병들어서까지도 작업을 완수했다. 두 천재 화가의 확연이 다른 태도는 그 시대에 (혹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예술가라는 지위가 지니고 있었던 콤플렉스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들이 작품 안에서 효과적으로 펼쳐지면서 관객들은 매번 깜짝 깜짝 놀랐다. 시각적 자극을 억압했던 중세의 종교관으로부터 예술가가 자유로워지면서 이러한 변화에는 가속이 붙었다. 그러나 이즈음, 역시 종교로부터 해방되어 날개를 달기 시작한 과학이라는 녀석은 예술의 지위를 애매하게 만들고 있었다. 예술은 과학의 힘에 업혀 드라마틱한 스펙터클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점점 더 강력한 스펙터클을 요구하는 관객들 보는 눈은 작가로 하여금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몰두하게 하거나, 혹은 몇 년 동안 천장에 매달려 그림을 그리는 극한 노동에 시달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과학자나 발명가 그리고 해부학자로서가 아닌 예술가로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시대의 화두도 담고 새로운 기술도 담고 수없이 많은 노동도 담고 있지만, 그것들 자체만으로는 그 존재가치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