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의 세잔은 고향 엑상 프로방스에 위치한 생트 빅투아루 산을 즐겨 그린다. 그가 남긴 수십 점의 생트 빅투아르 산들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한결같다. 비교적 먼저 그려진 1880년대 후반의 생트 빅투아르 산에는 좀 더 어두운 색과 분명한 윤곽선들이 담겨져 있다. 이 형태와 저 형태가 서로 싸우기라도 하듯,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이며 꿈틀거릴 것 같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조금씩 그의 작품을 알아봐주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동시대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훨씬 못 미치는 성공이었다. 화가는 살롱전에서 번번이 낙선했음은 물론이고, ‘낙선전’을 함께 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부류에 낄 수도 없었다. 타협을 알지 못했던 화가는 파리를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똑같은 대상을 반복해서 그리고 또 그린다.
이후 화가의 개성이 살아날수록 산 주변의 지형과 식물들의 윤곽선은 뭉개져갔고, 심지어 어떤 작품에서는 생트 빅투아르 산마저 땅, 하늘과 함께 덩어리져 버리곤 했다. 더 이상 생트 빅투아르 산은 작품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대신 대담한 화가의 터치와 함께 펼쳐지는 색의 향연이 전면에 드러난다. 변화는 조금씩 이루어졌다. 약간의 선을 뭉개고 좀 더 대담한 붓 터치를 남기기 위해 화가는 많은 용기를 내야 했을 것이다. 인생이 뭉개지고 있는 것만 같은 비참함이 오히려 캔버스에서는 새로운 방향의 힘으로 작용하니 삶이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언제 보아도 기백이 느껴지는 생트 빅투아르 산의 모습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기에 잠시 시간을 내주어 한참을 바라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지면을 통해 세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에밀 졸라와 폴 세잔과의 오랜 관계를 다룬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이라는 영화를 찾아보았다. 세잔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이 세잔의 자화상과 어찌나 느낌이 비슷한지, 그리고 에밀 졸라는 또 얼마나 그럴싸하게 연기되고 있는지 연신 감탄했다. 세잔의 화풍은 오랜 절친으로부터도 진정 이해받지 못한다. 화가는 소설가를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자신을 소재로 한 소설때문에 모욕당했다며 분노를 터뜨려 버렸고, 이에 맞서 소설가는 화가에게 ‘자네도 그렇고 자네 작품은 무정해, 그렇게 무정해서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네’라고 말하며 화가에게 비수를 꽂아 버린다.
세잔의 아내 오르탕스도 세잔에게 무정하다며 욕을 퍼부었다. 실존 인물과 놀라울 정도로 이미지가 비슷했던 주연배우들에 비해 영화에서 여인들이 지닌 매력은 매우 현실적이었고 자연스러웠다. 오르탕스는 그림 속 여인은 자기가 아닌 세잔의 이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여인이라며, 현실 속 아내와의 사랑을 외면한 채 그림에 매몰된 화가를 비난한다. 세잔의 무정함을 증명하는 좀 더 에피소드도 있었다. 영화 속에서 세잔은 모델을 서다가 못 견디고 몸을 꼬는 이들에게 ‘화가에게 사람은 사과 같은 거야, 사과는 움직이지 않아’라고 쏘아 붙이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더러 사과와 같다고 했으니, 무정하다는 말을 들어도 한참 싼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사는, 그러니까 ‘무정하다’는 말은, 필자에게 오랜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그들의 의견이 일면 맞기도 하다. 애써 찾지 않는 한 세잔의 작품에서 온화함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분노와 혼란의 감정은 종종 전달되기도 하지만 동료애나 우정을 찾기에는 대상이 지나치게 차가울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분해되어 버렸다. 화가의 의지가 대상의 참된 본질, 가장 견고한 그 무엇을 향하고 있으니 사사롭고 복잡미묘한 감정이 작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무정하다는 말이 그 자체로는 참 잔혹하면서도 어찌나 그의 작품을 얼마나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지, 무능한 글쟁이로서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다.
하지만 세잔의 작품을 아무런 감정도 연민도 없는 냉혈안의 작품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시시각각 미묘한 빛깔을 띠고 있는 생트 빅투아르 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역시 지독한 냉혈안이 아니고서야 마음속에 찾아드는 잔잔한 그 무엇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듯 쉽게 쉽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질색팔색하는 예술가들은 진정 토설하고 싶어 마음속에 맺힌 것들을 이처럼 최대한 간접적으로, 알 듯 말 듯 하게 전달하곤 한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이니,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이 주는 메시지가 이처럼 분명한 때가 또 있을까. 선한 의지를 지닌 모든 이들이 위로받는 2018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