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점프
/최인숙
발목을 묶으면 앞이 사라집니다
앞이 사라지면서 앞 대신 깊이가 생겨납니다
햇살이 뱀의 허물처럼 벗겨집니다
물 위에 음각되는 얼굴들은 가볍고 섬세해서
둘둘 말아 쥐거나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자리의 눈을 빌려 허공을 조각내고 있습니까
벗어나지 못한 고치처럼 지금 내 발을 당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과 코와 입이 다 눈으로 몰려듭니다
던져버릴 것은 다 던졌는데 나는 왜 여기에 묶여 있습니까
할랄하고 난 살코기처럼 나를 내게서 떼어 내십시오
나를 풀어 주고 강물은 다시 산 그림자를 우물거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지퍼처럼 자기를 열고 뛰어내립니다
-최인숙 시집 ‘구름이 지나가는 오후의 상상’
번지 점프란 무엇인가. 그것은 텅 빈 허공을 향해 나를 내던지는 일이다. 아주 잠깐새가 되어보는 일이다. 그 순간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온전한 몰입이다.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목숨을 내어놓는 일, 그 도전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에 나를 내어놓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나를 내던지는 일이며 현재의 밟고선 그 자리에서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발목을 묶고 있으면 앞도 사라지고 햇살도 뱀의 허물처럼 벗겨지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단계의 발전을 위한 일이란 눈앞의 난간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자리의 눈을 빌려 허공을 조각내며 산 그림자를 우물거리고 있는 강물처럼 정체된 나를 나에게서 떼어내야 한다. 할랄하고 난 살코기처럼 과감하게 분리하여야 한다. 변함없이 주어지는 오늘과 내일의 새로움을 위하여. /서정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