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LG아트센터에서 아주 독특한 셰익스피어 작품을 관람했었다. 이 무대에는 단 한 명의 여성 배우도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성 배우들이 여성 분장을 하고 여성 배역을 능청스럽게도 소화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곤 하는 바로 그 장면, 남녀가 서로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혀 불같이 사랑에 빠지는 신이 그날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한 귀족층의 부인이 아름다운 소년을 보고 사랑에 빠져 그를 뒤뜰로 유인했다. 그를 유혹하며 사랑을 갈구하는데, 돌연 이 배우가 상대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상남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빵 터져 나왔다. 고귀하신 부인이 갑자기 헐크로 변했으니 말이다. 배우들은 어쩌면 그리도 천연덕스럽게 남성과 여성을 넘나들며 위트를 치고 있을까. 재미로 치면 말할 것도 없고, 평소 여성이라는 굴레에 갇혀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이 속 시원하게 해소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셰익스피어를 일컬어 남성과 여성을 자유롭게 오고갔던, 성정체성을 뛰어넘어 진정한 위트와 휴머니즘을 실현했던 작가라고 논평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기저에는 인간과 여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저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성추행, 성폭력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요즘, 그간 우리가 접해왔던 수많은 작품들이 모두 인간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결여된 반쪽짜리 작품들이었을까봐 몹시 두려운 생각이 들곤 한다. 10년 전에 보았던 그 공연이 아주 많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오늘은 그 자체로 매우 풍요롭고 충만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1857)이다. 언젠가 필자는 밀레의 그림이 한때 우리의 주변에서 나폴레옹의 초상화와 함께 자주 볼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필자의 유년시절 이들은 미용실과 슈퍼마켓, 은행 등 도처에 달력으로 인쇄되어 걸려있었던 것이다. 밀레의 작품은 힘겨운 노동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과거 농촌 생활에 대한 향수를 자아냈기에 고단한 이들의 삶을 그처럼 푸근하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1848년 밀레가 평범한 농민들의 모습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처음 발표했을 때 파리의 화단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캔버스에 등장하는 인물이란 귀족층의 유명인사 혹은 역사적인 영웅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이 경건한 모습으로 작품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마침 프랑스 전역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기에, 밀레는 민중들의 삶을 대변하는 혁명기의 작가라는 평까지 내려졌었다.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한 이러한 평가들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밀레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딱 절반만큼만 알아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밀레는 머지않아 가난한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들에게도 이해받았으며 각광 받는 화가가 되었다. 관객들은 밀레의 작품을 바라보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꼈고 경건한 신앙심을 느끼게 되었다.
<이삭 줍는 사람들>에는 추수가 끝난 논 위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이삭을 줍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이들의 자세가 언뜻 보아도 힘겹고, 세부 묘사가 생략된 채 어둡게 칠해진 그들의 피부와 표정도 그렇다. 하지만 조금만 더 초연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면 다른 감동이 느껴진다. 인물들 뒤로 펼쳐지는 널따란 초원과 건초더미들, 저물어가는 날이 주는 아름다움이 보이고, 그러한 자연과 더불어 인물들이 이루고 있는 완벽한 조화가 보인다. 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일이란 고되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자세는 마치 영원토록 정치하고 있는 듯 탄탄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밀레는 직접 노동의 현장으로 나아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드물었고, 대부분의 드로잉과 채색을 실내에서 해냈다고 한다. 그러니 인물들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기보다 작가가 마음속에 그려온 이상화된 모습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진 진실된 자아상이 화면 한 가득 펼쳐지는 풍요로운 세계와 한데 어우러져 이처럼 정직하게 놓여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