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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감독관 조운상(趙雲祥)

 

 

 

수원화성을 만들면서 몇 명의 위대한 건축가들이 탄생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한 명의 위대한 건축가 조운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운상은 풍양조씨(豊壤趙氏)다. 그는 3남 3녀 중 차남으로 영조 24년(1748)에 태어났다. 풍양조씨는 노론으로 당시 실권을 갖고 있었기에 이에 힘입어 조운상은 관직 진출 초기부터 선전관(宣傳官, 왕의 근처에서 시위를 하면 왕의 명령 등을 전달)으로 정조의 옆에서 근무하게 된다. 정조 13년(1789)에는 개천(价川, 평안남도)군수(종4품)로 임명되어 부임하나 임기 3년을 채우지 못하고다음 해인 1790년에 물러났다. 그의 품성을 보면 바른 소리를 잘하고 개천군수로 있을 때는 엄하게 아랫사람을 단속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수원에 대규모 국가사업이 일어나면서 보직이 없는 조운상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 총감독관에 조심태, 부총감독관에 이유경을 선정하고 실제로 현장에서 일 할 감독관인 별감동(別監董)을 물색한다. 현재 보직이 없는 관료로 부지런하며 재간이 있는 무관 출신을 대상으로 하여 조운상 등 4명이 선정된다. 이들은 화성이 아닌 채석장부터 투입되어 현장에서 감독관직을 수행한다.

조운상이 축성에 관련한 시점을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적응시기로 축성(築城) 시작부터 을묘년 행차 이전인 1차 공사시점이다. 1793년 12월부터 1795년 1월까지 실제 별감동직을 수행한 140일이 해당된다. 이때는 전(前) 군수(郡守, 종4품) 품계로 남수문, 북성, 서장대, 서노대, 북포루, 서성, 남서성 등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이 시설들은 조운상 혼자 별감동직을 한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제도이고, 부사(府史, 종3품)도 있어 조운상의 단독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둘째, 공백시기로 조운상은 1795년 을묘년 행차가 끝나자 그 공로로 삭주(현재 춘천) 부사로 승진발령을 받는다. 하지만 생모(당시 76세)가 연로하여 멀리 지방으로 나가는 것이 꺼려 변경을 요청한다. 정조는 이를 승낙한다. 또 외직의 근무도 중요하지만 화성의 일도 중요하다고 말해 조운상이 외직으로 나가는 것보다 화성에서 계속 근무할 것이 좋다는 뜻도 내비친다. 그래서인지 조운상은 축성 사업에 보직은 없었지만 공사현장 주변에 있었다. 1795년 5월 8일 동문 터를 닦는 고유제(告由祭, 관련 신령에게 그 사유를 고하는 제사)를 지내는데 제주(祭主)로 참여하고 7월 15일에는 동장대 터를 닦는 고유제 전사관(典祀官)으로 참가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셋째, 완성시기로 조운상은 1796년으로 1월 현장에 정식으로 복귀하여 공사가 준공되는 시점까지 별감동직을 수행한다. 이때 품계는 전부사(前府使)로 이전보다 좋은 조건으로 참가하게 되어 더 자신감 있게 일을 수행한다.

특히 축성의 막바지에 일어난 서암문(西暗門)과 서옹성(西甕城)공사는 그가 맡은 마지막 공사이고 최고의 작품이 되어 오늘날 그를 다시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서암문은 서장대의 남쪽에 위치하며 1796년 6월에 만들어진다. 화성에는 5개의 암문이 있으며 서암문을 제외한 암문(남, 동, 북, 동남)은 모두 문짝이 외부에서 직접 보인다. 암문은 이름 그대로 외부에서 안 보이게 해야 하는데 이전에는 그렇게까지 만들질 못했다.

그러나 조운상이 감독한 서암문은 외부에서 문이 직접 보이지 않게 동선을 꺾어 출입하게 만들어진 진짜 암문이 된다.

서옹성은 현안(懸眼)의 개수를 줄인 남옹성과 동옹성처럼 타구와 현안의 위치가 불일치하여 미관상 안 좋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운상은 옹성 여장을 성가퀴에서 평여장으로 변경하여 현안과 타구의 불일치에서 오는 혼잡함을 없애고 타구의 상부를 막음으로 방어력도 높이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냈다. 이런 여장 제도는 이후 지방의 읍성까지 보급되어 지금 당진의 면천읍성과 고창읍성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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