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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바닥을 치고 올라섰을까

 

붉은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췄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샌들, 운동화, 구두가 하얀 선을 밟으며 우르르 간다. 저 신발들은 수없이 많은 바닥을 밟고 왔으리라.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것은 아니겠지. 그 바닥을 지나 여기까지 왔을 테니까.

바닥은 평평하게 넓이를 이룬 면이다. 공간의 가장 아랫부분으로 높은 건물의 각층마다 바닥이 있고 작고 네모난 상자에도 있다, 호수나 바다에 가라앉아 닿게 되는 것도, 추락해 파멸하는 곳도 바닥이다. 걸음마를 하여 첫 걸음을 내디딘 것도, 삶의 마지막을 맞는 물리적인 공간도 바닥이다.

바닥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말할 때 쓰인다. 빚을 지거나 생활이 어려워져 닿게 되는 곳이다.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나앉았다거나 밑바닥 생활을 했다고 한다. 주가가 떨어질 때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고 한다. 주로 어느 날 갑자기 내려앉는 경우가 많다.

아픔이 숨어 사는 곳이다. 한이나 슬픔은 아래로 내려앉는 경향이 있는지 아린 것들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닥에 쌓인다. 말 못한 상처와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 침몰한 배처럼 가라앉은 심리적인 공간이다.

물리적이면서 심리적인 말이다. 시장바닥, 건달바닥처럼 한동안 몸담았던 장소이거나 어떤 세계에서 정신적 기반을 이룬 곳이다. 그 바닥에서 30년을 일했다든지, 부산바닥에서 잔뼈가 굵었다든지 할 때도 어김없이 나오는 만만한 장소이다. 또한 속이 보이거나 숨겨둔 진실이 탄로 날 때에도 바닥이 드러났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로 한 여자가 보인다. 낯익은 얼굴이 분명 도현 엄마다. 짧은 커트머리에 흰머리가 두드러져 보일만큼 거리는 가깝다. 하지만 그녀가 입은 회색 티셔츠처럼 무채색의 표정으로 앞만 쳐다보며 가는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다. 신호 대기 중인 차 안에서 그녀의 발걸음을 쫓아간다.

작년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장례를 치르던 그녀는 몹시 야위고 작아보였다. 그렇잖아도 키가 작은 사람이 납작하게 바닥에 붙을 듯 했다. 검은 상복에 하얗게 쪼그라들어 땅으로 꺼질 것처럼 보였다.

그 후로 그녀를 한 번 만났다. 장례식 때 보다는 많이 평온해 보였지만 여전히 얼굴색이 어두웠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면 벌금을 내라고 할 것도 아닌데 그 물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지방의 친척 식당에서 일한다고 입을 떼었다. 너무 바쁜 곳이라 정신없이 일하다보면 슬픔에 빠질 시간도 없다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일을 하고 있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기대던 벽이 무너지고 바닥이 꺼진 그녀에 대한 걱정만큼 곧 일어서라는 믿음도 없지 않았다. 남편이 남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옛날 얘기를 하며 보조개를 피우며 다시 웃을 것이라고.

삶은 어쩜 자동사가 아니라 피동사일지 모른다.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리라. 의도하지 않아도 물살에 떠밀리는 잎사귀처럼 밀려서 가장자리에 닿는 것이리라.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더라도 또 다른 무엇에 떠밀려 살아낼 희망이 보이는 곳도 바닥이 아닐는지.

바닥의 속성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다는 데 있다. 내려갈 곳이 없다면 올라갈 일만 남았다. 그래서 바닥에 내려왔을 때가 모든 시작점이고 전환점이고 출발점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용감할 수밖에 없다. 그 힘으로 바닥을 치는 것이다. 바닥의 진정한 힘은 희망에서 나오므로.

그녀는 바닥을 치고 올라섰을까? 차에서 내려 부를까 하다가 그만 둔다. 사거리 한복판이었고 신호는 곧 바뀔 것이다. 사거리 신호등처럼 그녀의 인생 신호등도 언젠가 푸른색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횡단보도를 건넌 그녀가 서두르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보폭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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