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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어떤 중독

 

 

 

나는 카페인 중독자다. 커피를 마셨을 때의 팽팽한 느낌은 환희다. 더 이상 졸음이 오지 않는 것.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는 영상 2℃ 같은 신선한 이성. 그 아삭한 긴장이 좋다. 늙은 염소가 먹고 정력이 세졌다는 악마의 열매. 그것만이 나른한 정신을 깨울 수 있다.

카페인과의 첫 만남은 커피믹스였다. 커피와 프림, 설탕이 혼합된 느른하고 달짝지근한 가루. 그 맛에 이름을 붙인다면 ‘너에게 녹아드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달고 부드럽고 조금은 싱거운 귀한 맛.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맛. 혀에 감겨 속삭이는 맛에 나는 위로를 받았다. 그건 특별하고 서구적이며 우아하고 세련된 맛이었다.

하지만 원두커피가 일반화 되면서 그것은 흔한 맛이 돼 버렸다. 필립스 커피 메이커가 커피믹스를 촌스런 맛으로 밀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즐기게 된 커피믹스는 과거의 애인으로 밀려버렸다. 누구나 아는 맛은 더는 나를 흥분시키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 흔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게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커피를 사랑하는 방식은 늘 중독이었다. 대체불가능. 그것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그 무엇. 마지막 남은 초콜릿처럼 안타깝고 간절하고 초조하다. 커피를 마시지 못해 불안해지다가도 마시면 이내 평안해지는 것이다. 아침에 마셨어도 점심이면 또 마시고 싶고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카페인만이 흐릿한 정신을 또렷하게 해준다.

중독성이 있다는 점에서 커피와 사랑은 공통점이 많다. 상대를 만났어도 뒤돌아서면 또 보고 싶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상대만이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 중독을 견디지 못해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는지.

아무래도 커피와 사랑은 연관성이 깊어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관심 있는 상대에게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고 말한다. 아마도 커피를 마심으로 해서 또 다른 아름다운 중독에 빠지길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작용하게 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름다운 중독은 때로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오기도 한다. 약물이나 알코올에 중독돼 자신을 그 안에 매몰 시키는 경우처럼 사랑도 그렇다.

엘비라 마디간이라는 영화가 기억난다. 서커스단원인 줄 타는 소녀 엘비라와 탈영병이 된 유부남 식스틴의 파멸을 위한 사랑이야기다. 들판에서 나비를 쫓는 엘비라. 그리고 두 발의 총성을 끝으로 아름답고 짧은 그들의 사랑은 거기서 멈춘다. 인정받지 못한 사랑이 벼랑 끝에 다다른 것을 예견한 그들은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사랑을 죽음으로 끝낸다. 전반에 흐르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마지막 총성과 대조되어 영화의 비극성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터키 속담에 커피는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렬하고 사랑처럼 달콤해야 한다고 했다. 나도 사랑에 대해 이렇게 요구한다. 사랑은 커피처럼 검고 커피처럼 강렬하며 커피처럼 달콤해야 한다고. 사랑을 하려면 지옥의 끝까지 내려갈 각오도 해야 하는 것이라고.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처럼.

중독에 취약한 사랑의 부작용이 또 있다. 그것은 상대를 환상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것을 심리학 용어로 바꾼다면 ‘이상화’다. 프로이드가 말한 방어기제의 하나로 사랑에 눈이 멀어 상대를 좋게만 보는 것을 말한다. 결점을 전혀 보지 못한다.

확증 편향도 있다. 상대를 너무 이상화한 나머지 그것을 뒷받침해줄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다른 사실들은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포크로 찍듯 정보도 편식을 한다.

요즘 자신의 정치 논리만 이상화하고 다른 사실들은 보려고 하지도 않는 확증편향을 가진 중독자들이 보인다. 보고 싶은 곳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사람의 심리는 어디서나 비슷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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