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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양갱을 먹다가

 

 

 

 

 

뜬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힘주어 눈을 감아도 하염없이 흐르는 이 눈물의 시작은 양갱 때문이다. 시월의 가을 아침, 쌉쌀한 녹차와 더불어 다식으로 먹게 된 팥 양갱 한 조각이 모처럼의 공휴일 아침을 감성의 봇물로 허우적거리게 했다.

오늘처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달려갔던 곳. 팔순을 훌쩍 넘긴 하정 선생님은 아침부터 정갈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계셨다. 시간차를 두고 피고 지는 백일홍, 그 꽃은 언제고 방글거렸다. 항아리 장독을 열어놓아 문득문득 장 냄새가 스멀거리기도 하고 어설프게 심어놓은 녹차나무 잎들이 바스락거리는가 하면 항아리 뚜껑위로 소복하게 쏟아놓은 좁쌀을 먹겠다고 참새 떼 재재거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다구들을 펼쳐놓았다.

“차향이 좋습니다”

“역시 우리 차에는 다식도 우리 것이 가장 잘 어울리지?” 하시며 내어놓았던 누룽지, 팥 양갱, 증편을 나는 참 맛나게도 먹었다.

“요즘 내가 컴퓨터 재미에 푹 빠져서 지난 밤 잠을 설쳤어.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지 나도 내가 걱정이 돼 하하하!”

언젠가 눈이 펑펑 쏟아지던 수요일, 눈보라를 뚫고 엉금엉금 조심스럽게 들른 그 아침. 선생님께서는 갑자기 아랫목에 가지런히 펼쳐놓은 이불부터 들쳐 올리시며 빨리 발을 넣으라셨다. 엉겁결에 발부터 들이밀고 몸이 빨려 들어간 이불 속.

‘아, 온 몸이 녹아내리는 이 따스함이라니!’

“날씨가 너무 추워서 내가 아침부터 장작불을 땠지. 얼어서 올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게 선생님과 함께 했던 숱한 시간들이 나는 온전히 떠난 줄 알았었다. 며칠 째 눈이 쏟아지던 몇 년 전 그 밤, 선생님께서 훌쩍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 말이다. 하지만 오늘 양갱을 먹다가 그 소중한 기억들과 더불어 선생님 또한 온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는 걸 알고 말았다. 삶에 지쳐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특별한 말 한 마디보다 그저 따스한 차 한 잔과 함께한 그 시간이 너무나 큰 위로가 됐던 것이다. 어쩌면 그 시간과 추억들이 너무나 소중해서 결코 떠나보낼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남아있다는 것. 그것도 소중한 기억으로, 커다란 위안으로 남아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인 것 같다. 떠올린 추억 속 인물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곧잘 기도를 하곤 한다. 기억 속 그 감사한 분들에게 복이 깃들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노라면 그분들에게 그 복 또한 분명히 전달 될 거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고리타분한 생각이라며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요즘 인터넷이나 SNS 등에서 너무 쉽게 남을 향해 악플을 달거나 평가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언젠가 나 또한 쉽게 뱉어낸 말 한 마디가 혹여 상대에게 비수가 됐을까봐 잠을 설친 기억이 있다. 순식간에 생각하고 빨리 쏟아내는 인스턴트식 말이 아니라 오래도록 익히고 쌓아온 시간과 공감으로 만들어내는 슬로푸드와도 같은 추억들. 오늘 내가 양갱을 먹다말고 떠올린 그런 소중한 추억들이야말로 숱한 사람들이 바쁘고 힘든 하루하루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는 진정한 거름, 또는 보약이 아닐까 싶다. 두고두고 퍼내어 쓸 수 있는 진국과도 같은 보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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