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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아메리칸드림

식탁이었다. 큰 꽃잎 문양이 수놓아진 식탁보 한가운데 해바라기와 이름 모를 꽃들로 장식된 화병이 놓였다. 냅킨이 곱게 접혀있었고 은색 숟가락과 포크가 놓여있었다. 큰 접시들에는 구운 오리고기와 오믈렛과 샐러드, 미군들이 먹는다는 햄과 베이컨과 ‘에그 프라이’가 그득했다.

 

선교사님이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이모와 사촌 형, 누나들이 자리에 앉자 선교사님이 기도를 했다. 나도 고개를 숙이고 주기도문을 외웠다. 이모님이 나를 위한 기도를 특별히 하셨다. 이모는 나를 부를 때 ‘미스터 고’ 라고 했다.

 

“미스터 고가 주님의 은총으로 명문 ㅇㅇ대의 법대에 입학하였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크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모의 기도는 밝고 높은 톤이었다. 특히 법대라는 대목에 강한 악센트를 주셨다. 이모는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조카의 앞날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선교사님과 이모는 영어로 대화를 나눴고 누나들도 가끔씩 영어로 농담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손짓을 했는데 나는 몇 마디 단어를 알아들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아이 언더스탠드’ 라고 겨우 대답했다. 


그러나 덕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이모의 충고가 시작되었다. 이모는 한국의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한국 사람은 게으르고 더럽고 무엇보다 법을 지키지 않는 무식한 민족이었다. 한국 사람은 무식하게 술을 많이 먹었고 심지어 밥상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밥을 먹는 것도 미개한 행동이었다.

 

그에 반해 미국은 모든 것의 표준이었다. 이모는 ‘아메리칸 스탠다드’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했다. 나는 그런 이모의 말에 주눅 들었다. 무엇보다 영어는 내 인생의 큰 콤플렉스였다.

 

전곡에 사는 이모는 선교사의 초청으로 식구들을 전부 이끌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그때부터 전곡이모는 미국이모로 불렸다. 나에게 미국이모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미국이모는 세련됨 그 자체였다. 나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동경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인연은 내 생애 딱 한번 뉴욕에 열흘 출장 간 경험밖에 없었다.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나는 미국이라는 제국에 탑승하지 못한 승객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미국으로 갔던 사촌형이 제일 먼저 귀국했다. 형은 십 년을 미국에서 살았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귀국한 형은 술에 쩔어 살더니 어느 해 여름 홍수로 차가 흙탕물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이내 두 누나가 귀국했다. 누나들은 영어학원에서 강사를 한다고 했다. 그 후 미국이모도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년 전 나는 이모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재회를 위해 전곡에 갔다.

 

“아이고 행곤아, 너도 많이 늙었구나.”

 

미국이모에게 나는 더 이상 미스터고가 아니었다. 호호백발이 되신 이모의 주름진 얼굴이 애처로웠다. 이모는 더 이상 미국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모의 아메리칸드림은 깨진 걸까? 최근에 미국에서 들려온 지인들의 증언이 자꾸만 귀를 울린다.

 

“코로나가 분명하지만 병원비가 겁나서 진료를 포기했다.” 

 

흑인을 목 졸라 죽인 백인 경찰의 득의만만한 표정과 시위하는 시민에게 경찰차를 몰아가는 뉴욕경찰의 모습을 CNN 뉴스에서 본다. 숨이 막힌다. 나의 아메리칸드림은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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