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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북한학 박사의 흔들린 정체성... 시집 '두만강 시간'의 저자 위영금

간만에 만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드는 책
북한 이탈 그리고 정치학 박사 학위... 두만강에 중첩된 3대의 뼈저린 삶
잊고 싶은 기억 떠올리는 고통... 아픔의 시간 고스란히 책 속에 담아

다들 한 번 쯤은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아무 생각 없이 펼친 책 한 권을 밤 새워 읽었던, 혹은 별 기대 없이 보게 된 드라마나 영화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일 말이다. 간만에 그런 시집을 만났다. ‘두만강 시간’. 

 

보면 알겠지만, 책의 표지는 너무나 특별할 게 없다. 다른 책들과 섞여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다면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될 만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요즘 나오는 화려한 책들과 비교하면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은 없는 게 사실이다.

 

 

기자도 처음 책을 펼쳐들 땐 그저 훑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그냥 지나쳐 넘어갈 수 없었다. 결국 꼬박 몇 시간을, 책에 파묻혀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기지개를 켜며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아’ 하는 한숨 섞인 탄성과 함께 마음으로 들어오는 책, 이후에는 저자에게 소주 한 잔 건네며 위로의 시간을 나누고 싶은 책. 무엇보다 그 속에서 치유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이 책을 코로나19로 지친 우리네 삶 속에 선물해보자고 감히 추천한다.

 

 

북한을 이탈해 대한민국에 왔고, 최근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시집을 냈다고 해서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16일 경기신문 접견실에서 만난 저자의 첫 인상은 수수한 외모에 무표정한 얼굴, 좀 과장하면 사람들에게 호되게 당해 세상을 두려워하는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

 

사연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어색해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다. 곧 ‘두만강 시간’이란 제목의 책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선은 제목이 왜 두만강 시간이냐고 물었다.

 

“두만강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부모님, 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건, 그 시간들을 중첩적으로 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책 제목과 같은, ‘두만강 시간’이란 시가 눈에 들어온다. …/밤은 깊어간다/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잡은 손을 놓아버린 어머니/아들을 강 저편에 힘껏 밀어내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아들은 그 순간을 악몽처럼 기억한다/(중략)/두만강 가운데 시체 한 구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다/중국도 북조선도 관할이 아니란다/(중략)/동해바다에 가면 잃어버린 것들을 찾을 수 있을까/버리고 싶은 기억은 때로 너무 생생히 떠오른다/잊혀지지 않을 고통을/두만강 시간에 담는다
 

 

저자 위영금은 원래 강화 위 씨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식민지 시기인 30년대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갔고, 60년대에 부모님들은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으며, 그녀는 1998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중국으로 나오게 됐다고.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건 지난 2006년이다.

 

“한 개인의 일상이기도 하지만 한반도가 겪은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두만강 시간을 제목으로 뽑았습니다.”

 

90년대 북한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고 그녀는 기억한다. 고난의 행군은 물론이고 마을의 어려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딸만이라도 잘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으로 떠나게 된 길. 지금의 그녀는 “(언니와 조카) 생사를 알길 없어 풍족한 생활도 가시방석 같다”고 말한다.(형제 中)

  

당시에 대한 고통의 흔적은 ‘아버지1’에 잘 드러나 있다. …/만약 이 마음이 당신 계신 곳에 닿을 수 있다면/당신의 부재로 추웠던 시간을 또박또박 적어/하얀 봉투에 넣어 보내리다/(중략)/당신은 내 손목을 이끌어 두만강을 건너고/온갖 시름 내려놓은 듯 만족한 모습으로/다시 강을 건넜습니다/광야에 던져진 나/그동안 얼마나 추웠는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는지/얼마나 원망했는지 아십니까/(중략)/저를 용서해주세요

 

 

이렇듯 책 속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던 저자의 삶과 시대적 상황이 녹아 있는 74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시의 형식으로 각각 쓰여 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줄거리가 탄탄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방민호 문학평론가는 해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시들은 손으로 휘휘 저어 건져내려 해도 전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가 많은데, 이 시집 원고들은 그렇지 않았다. 위영금 시인의 시들만큼 깊고 짙은 사연들을 듬뿍 담고 있는 시집을, 나는 최근 한국의 시집들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자기 삶의 이야기의 증언적 진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 북한학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해 낸 그녀다. 물론 이 과정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 꺼내고 말로 하는 것이 그토록 커다란 고통이 될 줄 몰랐던 것이다.

    

 

“북한을 좀 더 잘 알아서, 많이 배워서 알리자 이런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었죠. 그런데 하다 보니까 도대체 나는 뭐지, 나는 누구지 얘기할 거리가 없는 거예요. 논문을 쓰면서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북한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죠. 일부러 잊고 살기도 하는데, 다 잊었던 북한을 새삼 기억해내야 되잖아요. 또 분석하고 설명해야 하고…”

 

막막하기만 한 상황에서 보호막이 돼주던 가족과 부모님 생각도 나고,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몸도 아프고 이러다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던 어느 날, 길었던 머리카락을 마구 잘라버리고 엉엉 울던 그녀가 찾은 비상구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그녀가 마침내 껍데기를 벗고 처음으로 세상에 말을 걸고자 조심스레 내놓은 게 바로 이 책이다. 스스로를 쓴 책, 자기를 말하고 누군가는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첫 언어가 생긴 셈이다.

 

 

마주 앉아 있어도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면 물어볼 질문도 없고, 나눌 대화조차 없지 않겠냐고 그녀는 말한다. 남북으로 갈라져 살았던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하나의 생각이 아니라 여럿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길 소망한다.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가시철조망처럼 온몸에 두르고 피 흘리며 몸부림친, 한 인간상으로 기억하면 좋겠어요. 이 시집은 저에게 있어 세상과의 첫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첫 시집이다 보니까 힘들었던 과정이 많이 담겼어요. 아프죠. 그러나 그 아픔도 누가 읽어주고 공감해주면 치유의 과정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자 위영금은 2019년부터 도산통일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는 ‘내 고향 만들기 공동체’ 대표를 맡아 각종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는 연구 활동은 물론 이들과 함께 시나 수필, 에세이 등의 글을 쓰고 이를 묶어 책으로 내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우리 한반도가 겪은 슬픔에 다름 아닌, 그녀의 행적을 좇는 일은 기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해서 이 책을 소개하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더 부족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치유의 시간을 선사받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저자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새해, 새로운 각오로 멋지게 날아오를 그녀의 활약상을 기대해본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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