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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화양연화(花樣年華) 3

 

똑순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뭐라고 몇 마디 하더니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내 손에 건네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이름은 나도 모른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어린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똑순이 반장이라고 불렀다. 똑순이는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들어왔다고 했다. 150이 될까 말까 한 작은 키였다. 하지만 얼마나 야무지고 똘똘했는지 10년 만에 상동공장 반장이 되었다. 억세다는 아줌마들도 똑순이에게는 꼼짝하지 못했다.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석고 틀을 번쩍번쩍 들어 날랐다. 노조 대의원이었다. 그러나 데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석현공장에서부터 임금인상과 노조민주화 투쟁이 시작됐지만, 똑순이는 나서지도 않았고 다른 남자 대의원들처럼 아줌마들이 데모에 참가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모두 본사까지 가두 시위에 나설 때도 똑순이는 묵묵히 자기 일만 했다. 상동공장 경비실 옥상에 올라가 데모를 할 때도 공장 창문으로 쳐다만 보던 똑순이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데모를 주동하다 해고되었고 복직 투쟁 30일째였다. 저녁 퇴근 시간에 상동공장 앞에 와서 피켓시위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검정 비닐봉지를 열어보았다. 하얀 우유 한 팩과 소보루 빵 한 개가 들어있었다. 공장에서 주는 오후 간식이었다. 뭔가 신문지에 싼 것이 있었다. 풀어보니 앞치마였다. 두툼하게 두꺼운 천을 대서 박음질한 군청색 작업용 앞치마였다. 아마도 늘 헤져서 무릎이 너덜너덜해진 내 작업복을 봤던 모양이다. 앞치마 안쪽에는 흰 실로 글씨가 누벼져 있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

 

똑순이가 설마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상동공장 수위실 옥상에 올라가서 나는 조합원들에게 말했다. “일당 몇천 원 더 올려 받겠다는 것이 투쟁의 전부가 아닙니다. 어용노조 민주화 만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겁니다. 우리는 공순이 공돌이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 이 말입니다.”

 

나는 해고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의식화 교육을 했다는 명목으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그날이 똑순이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교도소 면회 창으로 공장에 같이 다녔던 동료들의 밝은 얼굴이 보였다. 이런저런 안부 끝에 똑순이의 소식을 전했다. 내가 감옥에 가고 나자 회사에서는 나를 빨갱이로 몰았다. 대학생 출신 불순분자로 낙인을 찍었다. 공장장과 어용노조 위원장과 대의원들이 나섰고 데모에 동참했던 아줌마들도 동조했던 모양이다. 나를 지지하고 도와주었던 조합원들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노조 활동이 더 어려워졌다. 그때 똑순이가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뒤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전했다.

 

“언니들도 월급 오른다고 좋아했잖아? 의리가 있지. 사람들이 이러면 안 되지? 누가 누구를 의식화시켰다고 그래? 우리가 좋아서 한 일이잖아? 한번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한 거 아니야? 이건 아니지.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는 지키고 살자고.”

 

그 뒤로 나는 똑순이를 만나지 못했다. 멀리 시집가서 잘 산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을 뿐이다. 똑순이가 그립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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