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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모친이 39년생 토끼띠이니 83세가 되었나보다. 46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육남매를 키워오셨다. 이번 추석에 비대면이기는 하지만 면회가 가능해서 요양원으로 면회를 갔다.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셔온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나간다. 유리창 너머로 슬며시 쳐다본 얼굴에 주름이 많고 부쩍 늙으셨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시는 어머니였다.

 

"행곤아 느그 집 좋더라. 천장도 높고" “아야, 느그 집서 이북이 가깝지야.” “옴매, 금강산 가보니 거지도 그런 거지들이 없드라.”하는 소리를 이번에도 여러 번 반복하셨다. 단 한번 단체로 금강산 관광 가셔서 보신 북쪽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신다. ‘쩝’ 외가의 내력인 치매가 심해지셨다. 외할머니, 큰 이모, 둘째 이모 모두 치매가 심하게 왔다가 돌아가셨다.

 

부친이 위암으로 투병하시다 큰 수술을 두 번 하셨지만 결국 돌아가셨을 때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때가 84년인데 나는 군대로 끌려가고 그 암담했던 시절을 어떻게든 모친이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헤쳐 나왔다. 그 풍상을 같이 겪어낸 어린 동생들은 모친을 대하는 애틋함이 남다르다. 나는 묘하게도 일찍 가신 부친이 더 애틋하다. 그런 모양이다. 막상 어린 동생들은 일찍 가신 부친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모친은 가끔씩 부친에 대한 푸념을 하시곤 한다. "아이고 그 인간 만나서" 이런 식의 장타령이다. 지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러나 모친의 간난신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아마도 모친 나이대의 부모들 대부분이 그런 인생의 역경을 딛고 살아오셨을 것이다. “느그들 델꼬 살라믄 뭐든지 했다.”

 

모친의 단골 레퍼토리다. 악착같이 별의별 일을 다 하셨다.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일도 하셨고 험한 일도 하셔야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 앞에서 선술집을 하셨다. 어머니 가게의 단골손님은 내가 다니는 학교선생님이었다. 어머니는 학교선생님들에게 돈은 못 드리고 대신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 어머니는 새벽에 목포역에 나가 첫 차로 도착하는 손님들을 상대로 ‘쉬었다 가세요’ 하면서 역 앞 사창가 포주들에게 손님을 보내주고 용돈을 벌기도 하셨다. 어느 해인가는 시골 장마당을 돌아다니면서 관상도 보고 손금도 보기도 했다. 제법 용하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확인은 안 되는 이야기다. 그렇게 살아온 그 세월을 알기에 늙어가는 모친의 주름이, 왜소해져가는 어깨가, 구부러져 가는 허리가 야속하다.

 

모친에게 자식 키우는 일은 모든 가치의 전부였다. 남의 집 담을 넘을 수도 있고 비렁뱅이를 할 수도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은 사면받을 수 있었다. 체면이 깎여도 부끄러울 것도 없고 남에게 손가락질받아도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자식과 같이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아남아야 하는 것 앞에서 자식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었다. 모친은 그렇게 살아왔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설사 자신이 죽더라도 지켜야 할 뭔가가 진정 없는 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라도 지켜야 할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는 없을까? 지켜야 할 그런 것 말이다. 참 어렵다. 우리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나 살자고 남 죽이는 것에 대해서 혹시라도 놓쳐버린 것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