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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⑭일제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를 공략하다

한국 근대사 항일 투쟁서 핵심적인 활동, 경기도
3·1운동의 분수령이 된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치열했던 경기도의 3·1운동 및 다양한 항일 운동

 

경기(京畿)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원래 ‘경’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京師)’를 뜻하고, ‘기’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했으나 점차 ‘왕도의 외곽지역’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조선 시대 왕도와 왕실을 보위하기 위해 설치된 왕도의 외곽지역을 말한다. 또 행정상의 경기도는 서울과 인천을 제외한 서울 근방의 지역이었다.

 

경기도의 인문지리적 조건은 항일운동사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의병운동은 경기도가 중심이 되어 서울로 향했고, 독립운동의 경우 서울에 소재한 일제 조선총독부가 독립군의 궁극적인 공격 대상이 됐다. 특히 경기도의 항일운동은 일제의 통감부나 조선총독부 공략의 역할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다. 경기도의 항일투쟁이야말로 한국 근대사 항일투쟁에서 중요하면서도 핵심적인 활동을 담고 있다.

 

3·1운동의 분수령이 된 ‘2·8독립선언’

 

 

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면서 강압적인 무단통치와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국민들의 생존까지 위협했다. 이에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일원화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반 조성으로 이어졌다. 1918년 말부터 국내에서는 이미 학생·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졌다.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동한 ‘2·8독립선언’은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 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사건이다. 대표는 최팔용·윤창석·김도연·이종근·이광수·송계백·김철수·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춘 등이다.

 

이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받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6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팔용이 대표로 나가 이광수가 작성한 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 만장일치로 가결해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4개항으로 구성된 결의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한일합병은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않았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는 등 독립 주장 ▲둘째,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 대회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판결할 기회 요구 ▲만국회의 민족자결주의(민족들은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 일본 주재 각국 대·공사가 이 같은 내용을 각 그 정부에 전달할 것 ▲넷째,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할 경우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등이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60여 명이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그 중 9명은 일체의 방청이 금지된 채 열린 재판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2명은 1년, 나머지는 9개월에서 3개월까지 금고에 처해졌다. 그러한 2·8독립선언은 곧장 국내 민족지도자 및 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됐다.

 

2월 28일 밤까지 민족대표 33인이 선정됐고, 3월 1일 아침 각 집 앞에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이 뿌려진데 이어 오후 2시 정각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태화관(泰和館)이라는 요릿집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기에 이른다. 당초에는 탑골공원에서 발표 예정이었으나,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장소를 변경, 조용히 선언식을 진행했다.

 

선언문을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은 즉시 일본경찰에 자수하고 순순히 연행됐으며,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대표들과는 별도로 선언식을 진행하고 만세운동을 개시하게 된다. 이때 33인은 옥고를 치렀으며,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고,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사람도 많았다.

 

 

치열했던 경기도의 3·1운동 및 다양한 항일운동

 

경기도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만세시위가 벌어진 지역이다. 1919년 3월부터 3개월간 추이를 보면 경기도와 경성부의 합계 횟수가 415회이고, 이 가운데 경성부의 31회를 제외하면 경기도에서 벌어진 것이 384회나 됐다. 그러니 처벌자의 숫자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의 지역별 탄압 수치에 관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총 776건 중 경기도가 256건으로 전체 32%로 나타났다.

 

특히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은 경기도 3·1운동의 치열함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모두 28명이 무참히 살해 되고 민가 30여 채가 불에 탔다.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도 다양하게 분화됐다. 한편에선 실력양성운동과 자치운동 같은 타협적인 노선이, 다른 한편으로는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좌우 합작해 신간회를 결성하게 되는데, 1927년 2월의 일이다. 이들은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구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을 행동 강령으로 내세웠고, 연말까지 전국에 100여 개 지회를 설립하며 조직을 갖췄다.

 

경기도 지역에는 1927년 6월 경성을 시작으로 8월 성남과 광주, 10월 수원, 11월 안성, 12월 인천, 1928년 3월과 6월 각각 고양 서부지역과 강화가, 1929년 8월 장호원, 1931년 1월 광흥지회 등이 설립됐다. 신간회는 지회를 중심으로 각 지역 특성에 맞게 회관 건립, 이재민 구제 등 사회구제 활동과 함께 언론, 집회, 결사, 출판 등의 자유 쟁취와 청소년·부인 형평 운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쳤다.

 

 

여성단체 근우회 역시 이 시기 좌우 합작으로 생겨난 전국적인 여성조직으로, 1927년 5월 구성된 후 1929년까지 국내에 57개, 해외에 2개 지회가 만들어졌다. 경기도에는 개성, 인천 등지에 형성돼 남녀평등, 부녀노동자의 보호, 생활개선 등에 앞장섰다. 

 

그런가 하면 노동계의 조직화와 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다. 1920년 4월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지부가 인천과 강화, 개성에서 조직됐고, 1922년에는 인천노동연맹이 노동조합 성격으로 결성됐다. 1920년대 말에는 파업의 참여 범위가 확대, 광산노동자와 토목노동자의 파업이 증가하는 모습도 보였다.

 

1930년대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민족적, 계급적 각성이 높아졌다는 특징이 있는데, 일제의 타도와 민족의 독립을 이루지 않고서는 이러한 상황이 개선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족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게 됐다. 경기도 각 지역에서는 소작인들이 단결해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지주의 수탈과 횡포에 대항해 소작쟁의를 벌였다. 1930년 3월 수원과 진위(현 평택) 지역에서 수진농민조합이 창립된 것과 같이 혁명적인 농민운동 단체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함께 경기지역에선 각 영역에 걸쳐 여러 가지 항일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론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이, 사회경제적으로는 농민운동에서부터 노동·여성·학생·소년·물산장려운동, 협동조합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됐다. 수원·인천·개성을 중심으로 민립학교들의 민족교육을 비롯한 문화운동 등 모든 영역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된 곳도 경기도였다.

 

우선, 1919년 5월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의 후신으로, 11월 결성된 혈복단의 수원지부인 ‘수원 혈복단’이 있었다.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주축으로 움직였으며, 구국민단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고 독립신문의 배포를 담당했다. 또 수원고등농립학교 학생들은 농촌계몽운동, 천도교 조선농민사 수원지부 설치, 야학운동 등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1927년 6월 건아단, 1928년 7월 조선개척사 등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경기지역 학생 비밀결사운동으로는 조선학생동지회의 제2의 3·1운동 계획, 신공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이 중심이 된 조선예술호연구 구락부의 무장항쟁계획, 강제징병을 피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포천 보덕사 조선민족협동단 무장투쟁 기도 등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학생운동은 학교 내부의 문제인 동시에 일제에 대한 반일문제로 출발, 일본인 교장과 교사 배척 등의 이슈로 동맹휴학을 단행하거나 학생비밀결사 활동을 벌이는 등으로 전개됐다.

 

 

1930년대 학생운동의 중요한 부분은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제의 우민화 교육정책에 반대해 문맹 퇴치와 농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전국에서 펼쳐졌다. 개성 송도고보, 미리흠여학교, 호수돈여고보 등의 학교가 문자보급운동에 적극적이었고, 브나로드 운동 참여는 경기도가 가장 많았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으로 수원, 안성, 양주, 포천, 고양, 시흥, 광주, 강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것이 화성군 샘골마을과 주변 지역에서 벌인 최용신의 농촌계몽 운동이다.  

 

3·1운동 후에는 특히 도시와 농촌에서 여성 교육을 위한 강습회나 토론회 등이 활발하게 진행됐는데, 경기도 내에 부녀들을 위한 야학이 40여 개소가 운영됐다. 여성은 다음 세대 어머니로서, 여성 교육은 미래 세대와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