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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벽

 

 

완벽한 대본이라 해도 NG는 생긴다. 정해진 대사와 지문이라 해도 피할 길이 없다. NG는 대본 따라 연기하는 배우들만의 것이 아니다. 촬영을 멈추게 하는 요인은 의외로 많다. 도로를 통제해도 날아드는 비둘기를 막을 수 없고, 급작스러운 바람에 조명이나 소품이 넘어질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대본뿐이다. 정해진 대본에 맞춰서, 날씨와 장소와 시간과 상황과 감정을 연출하는 건 쉽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품은 완벽한 대본이 있지만, 대본 따라 살아지는 건 아니다.

 

아이의 꿈이 또 무너졌다. 삼 년 째다. 아이의 침묵은 무너지는 빙산처럼 시리고 아득하다. 손을 뻗어보지만 헤아릴 길 없는 벽이다. 벽 너머에서 침묵이 눈처럼 쌓인다. 예고도 없이 쌓이는 눈 때문일까. 취준생 가족의 겨울은 목부터 얼어붙는다. 남은 한 장의 달력조차 칼날이 되어 가족의 목을 겨눈다. 재작년이 그랬고 작년 겨울 역시 그랬다. 이런 겨울은 아이가 꿈꾸는 대본 어디에도 없다. 없는 내용의 대본을 펼쳐 놓고 아이는 침묵과 마주한다. 마주한 둘의 틈을 누가 파고들 수 있을까. NG를 외치며 멈춰 세울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술을 마셨지만 위로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리도 변변찮은 아비를 아비라 부를 수 있을까. 아비에 걸맞는 자격이 있기는 할까. 너를 끌어안았을 때, 펄펄 끓던 얼굴과 귓불을 아비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런 너의 등을 토닥이며 아비는 ‘괜찮다’라고밖에 하지 못했다. 하고 많은 말 중에 아비랍시고 한다는 소리가 ‘괜찮다’였다니. 그런 못난 아비를 향해 너는 ‘죄송해요’라고 했던가. 그런 걸 보면 너 역시 아비 못잖은 바보가 틀림없다. 죄송한 것은 네가 아니라 아비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불 꺼진 거실에서 우두커니 앉아 새벽을 기다렸다. 새벽안개 자욱한 공원을 산책하다가 환경미화원들과 마주쳤다. 분리수거되지 않은 쓰레기 봉지들이 트럭 위로 던져졌다. 불쑥, 이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갑자기 찾아가도 반겨줄 이가 있을까. 전화번호 몇 개에 문자를 남겼다가 가장 먼저 날아온 답장대로 행선지를 정했다. 화가를 찾아갔다가 역사학자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꾼을 만났다. 궁금한 만큼 반가움도 컸다. 그이들에게도 꿈꾸는 대본이 있을까. 헤아렸지만, 보이는 만큼만 아는 것이 각자의 삶이라서 대본의 속뜻을 읽을 수 없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방안은 고요하다. 아내가 걷어온 수건 빨래를 마주 앉아 접는다. 아내는 아내 방식대로 접고 나는 내 방식대로 접는다. 다섯 식구라서 그럴까. 문득, 방을 이루는 네 개의 벽이 우리 가족 같다. 가족 누구든, 지친 몸을 기댈 네 개의 벽이 방에는 있다. 무너지는 마음을 맡길 수 있는 벽이 네 개나 있다. 기대 보면, 각자의 벽마다 등에 닿는 애틋함이 다르다. 벽 너머에서 전해오는 두근거림이 다르다. 달라서, 가족이라는 네 개의 벽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방 안에 앉아서, 나를 보듬은 네 개의 벽을 바라본다.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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